상단영역

본문영역

호남문인 석천 임억령이 노래한 송장군은 누구인가

[기획] 완도의 민중영웅 송징, 김통정의 변이칭 가능성에 대한 연구 / 1. 서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2.13 15:30
  • 수정 2019.12.13 15:34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 주> 오랫동안 완도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송징 장군이 어느 순간 완도 역사에서 소거되었다. 완도를 대표하는 인물 장보고 대사의 역사성과 영웅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짐짓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송징 장군의 역사성과 영웅성을 넘겨받지 않더라도 장보고 대사의 역사적 위치가 공고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따라서 송징 장군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이 글은 장보고 대사에 귀속되었던 송징 장군의 역사성과 영웅성의 개별화와 완도 역사에서 소거(掃去)되었던 송징을 복원하고, 서남해 지역사의 한 장면을 재구성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우리 고장 완도 장좌리 장도에는 수백 년 계승되어 온 당제가 있다. 이 당제는 조선조 자료를 근거로 하더라도 600년을 관통하며,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날에 거행된다. 송징(宋徵)을 주신으로 하며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을 무대로 활동했던 무장 정년을 오른쪽에, 그리고 고려 말 승려 혜일대사를 왼쪽에 배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장보고를 추배하여 송징, 장보고 양위를 중심으로 배향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사묘(祀廟)조에 등장하는 호국신사(護國神祀)


장좌리 당제의 문헌상 기원은 성종 6년(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사묘(祀廟)조에 등장하는 호국신사(護國神祀)다. 해남 출신으로 송징 연구의 선구자 석천 임억령의 조사에 따르면, 나무를 깎아 만든 송징 형상을 모시고 매년 복납에 그를 기리는 지내던 곳이 호국신사다. 

독립 행정구역으로 개편되기 전 완도체도(體島)는 아주 오랫동안 강진현 소속이었다. 석천이 완도 호국신사를 답사하기 전 강진의 일부 유생이 장도 호국신사를 다녀갔다. 호국신사의 제의를 음사로 취급한 일부 유생들이 송징의 호국신사를 훼손했다. 그 후로도 완도 민중은 송징당(宋徵堂)으로 지칭하며 제를 모셨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는 수백 년 이어오던 송징당의 명칭이 장보고 사당으로 변경되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완도 주민은 지금도 송징을 장보고 이칭으로 인식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임억령이 남긴 시 「宋將軍」과 「宋大將軍歌」를 통해 ‘송징 = 장보고 별호’ 견해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석천 임억령이 남긴 시와 사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송징과 완도를 둘러싼 역사적 상황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동안 송징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송징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문헌자료를 통한 송징의 정확한 규명에는 실패한 것 같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모호한 정체의 송징을 청해진 시대로 역류시켜 마침내 장보고와 연계를 시도했다.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에 머물며 장보고에게 의탁했던 신무왕 김우징(金祐徵)과 상대등 김예징과 연결해 ‘송징은 장보고 별포(別號)’ 설을 생산했다. 불행히도 이 같은 설정은 완도 역사에서 송징을 소거(掃去)하고 말았다.

송징의 장보고 별호설에 대해 임형택 선생은 ‘전설로 전해오는 송징의 역사적 실체가 파악되지 못한 까닭에 실체의 모호함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장보고에 대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주강현은 장보고와 송징의 대응을 강력히 부정하며 분노했으며,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송징을 삼별초 시대의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나, 실체의 모호함을 해결할 문헌자료 확보는 난망해 보인다. 

송징을 구명(究明)하려는 시도가 근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16세기 중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인출된 직후에도 송징에 대한 자료를 추적했던 단서가 조선 전기의 유학자 석천 임억령(林億齡)의 문학작품으로 남아있다. 

해남 출신으로 중앙에 출사해 홍문관 관료 이력을 지닌 석천은 강진, 완도 노인들을 상대로 송징에 대해 채문(採問)한 것 같다. 그리고 채문한 내용을 사초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송징 관련 시 「송장군」과 「송대장군가」를 남겼다. 송징의 실체를 구명하려는 본 글은 석천의 시를 가장 중요한 원천자료로 활용한다.

강진, 완도의 고로들에게 채문해 남긴 송징 장군에 대한 석천의 「송장군」


강진, 완도의 고로들에게 채문해 남긴 송징 장군에 대한 석천의 「송장군」은 7언 8행의 율시다. 

「송장군」은 석천이 유학자적 관점에서 마치 사초를 정리하듯 매우 정제되어 있다. 이와 달리 「송대장군가」의 구성은 7언 64행에 이어 5언 14행이 추가된 78행의 시적 구조를 달리하는 서사시다. 동일 작품에서 시적 구조를 달리하는 것은 작가의 특정한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석천은 「송대장군가」 시적 구조 변환을 통해 민중이 집단 기억으로 전승한 송징 전설 또한 국사(國史)의 일부라는 당위를 강조하려 5언 14행의 여운을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는 음성중심주의공동체의 음성정보를 문자중심주의 자료에 편입하며 지식을 축적했다. 음성중심주의공동체 음성정보의 문자화는 문자중심주의공동체 채록자의 이해체계에 따른 굴절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석천이 송징을 채문하던 시대에도 완도체도는 음성중심주의 공동체였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된 송징의 표기 [宋徵]의 구명을 위한 연구도 음성정보의 문자정보로 편입 과정이므로 그 굴절 위험성은 마땅히 검토되어야 했다. 

송징 장군 구명(究明)을 위한 이 글에서는 먼저 석천 임억령이 남긴 두 편의 시를 통해 송징의 ‘장보고 별호’ 주장의 문제점을 짚게 된다. 또 석천의 시와 사료 기록을 중심으로 송징과 완도를 둘러싼 삼별초 진도시대 서남해의 지역사적 상황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자료가 지극히 미흡한 삼별초 항쟁기 수립한 진도정권의 전략적 상황을 추론함으로써 송징과 김통정(金通精)의 친연성을 도출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료에 등장하는 [宋徵]이 제주로 퇴각한 삼별초 지도자 김통정(金通精)과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가설에 이르게 된다. 가설을 입증하는 과정은 음성중심주의 공동체인 서남해 민중이 영웅으로 추앙했던 김통정의 명칭 수용 단계, 구전되는 전승 단계, 문자로 고정되어 문헌에 편입되는 단계를 두루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金通精] 소릿값의 [宋徵] 변이 과정을 언어음성학이 제공하는 언어 규칙성의 도움을 받아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20세기 들어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통시적 규칙성을 발견하려는 다양한 노력으로 많은 언어학적 성과를 축적해 이를 음성학, 음운론 등으로 체계화했다. 언어학의 세부 분야인 음성학과 음운론이 다루는 분야가 음성정보의 전승 수단인 ‘소리’와 ‘소리의 표기’ 그리고 ‘소리의 작용’에 대한 분석이다. 

음성학과 음운론은 문자로 고정되기 전 음성중심주의공동체 역사를 탐색하기 위한 매우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송징에 대한 최초 문헌자료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사묘조에 수록된 [宋徵] 기표의 생성과정을 살피는 것은 본 글의 핵심 관점이 될 것이다.

신현성 / 한국교육진흥연구소 부소장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