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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失手)!

[완도차밭, 은선동의 茶 文化 산책 -91] 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2.06 14:25
  • 수정 2019.12.0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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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차를 맛깔스럽게 잘 우리다가도 순간 다른 생각에 중정의 법을 놓쳐 그 차의 진성을 드러내지 못하여 그 차가 갖는 고유의 맛과 향을 내지 못할 때가 있다. 만약 어른을 모시는 자리거나 맛과 향을 평하는 자리에서 그런 경우가 발생하게 되면, 그 자리에 함께한 분들도 물론이지만 그 차를 만든 분이나 그 차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평소 중정의 법도를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정성들여 마시게 된다. 그것이 차생활의 본연이며, 또한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공부인의 심법이기도 하다.

실수! ‘조심하지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잘못함, 또는 그런 행위. 같은 말로 실례(失禮)가 있다.’라고 사전에서는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단순히 몰라서 뭔가를 놓친 경우로만 알아왔던 것이 매우 확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말이나 행동이 예의와 법도에 벗어나거나, 하지 말아야 하거나, 혹은 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고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속에 실수를 하거나 하게 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그런데 거기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전혀 조심함과 부주의에 대한 개념 없이 행하는 경우이다. 즉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거의 폭력적으로, 그 행위가 매우 거칠고 일방적이다.

둘째는 실수이고 실례임을 아는데 자기도 모르게, 혹은 습관적으로 범하게 되는 경우이다. 

셋째는 어쩌다 부지불식중에 하게 되는 경우이다.

넷째는 상황이 나의 실수처럼 상대가 오해하게 되는 경우이다. 난감하지만 때를 기다려 순리적으로 풀어내야 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 하고자 하는 노력이 매우 필요하다.

다섯째는 눈앞에 보이는 일의 현상만을 믿고, 상대를 평가하거나 결정짓는 경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대의 입장은 살피지 못하고, 정확하지 못한 판단으로 상대나 상황을 판단 결정하는 경우로 그 사람에 대해 극단적이고 무서운 판단을 하기도 한다. 무서운 실수이자 돌이킬 수 없는 실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건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내용면에서 진실인가 하는 것은 별개일 수 있다. 즉 사건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만약 나에게 없다면, 나의 모든 판단을 유보할 필요가 절대적으로 있어야 한다. 직설하면, 나의 부족한 안목으로 사람을, 혹은 세상을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 부족함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

정리하면, 남의 단점과 실수와 실례에 대해 미리 판단하고 결론짓지 말자. 일단, 무슨 까닭이 있겠지, 그럴만한 상황이 있을거야, 혹은 그도 그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어 해보자. 그리고 기다려 주자. 용서는 엄밀하게 말해 나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한치 앞도 모른다. 빛 한줄기 없는 암흑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때론 넘어지고 엎어지고 밀치고 밀리고, 그러다 다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오히려 넘어지면 왜가 아니라 얼른 손잡아 일으켜 세워줘야 한다. 이것은 조건 없는 일이어야 한다. 넘어진 그가 바로 나이거나 내 가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고 왜하면 참 안타깝고 암울한 상황만 만들고 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넘어지고 엎어지고 실수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누가 있어 그 실수를 질타할 수 있겠는가?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헌부에서 최종적으로 죄를 논하기에 앞서 잠시 차를 마시며 숙고하는 ‘다시(茶時)’를 행하는데, 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우리도 차 한 잔 마시며 시비이해를 잠시나마 내려놓아 봄은 어떠할까? 차 한 잔 마시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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