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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열다섯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15]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1.25 12:49
  • 수정 2019.11.2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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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不見 군불견 - 그대 아니 보았던가?
弓福山中滿山黃 궁복산중만산황 - 궁복산에 가득한 황칠나무를.
金泥瀅潔生蕤光 금니형결생유광 - 금빛 액 맑고도 고와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割皮取汁如取漆 할피취즙여취칠 - 껍질 벗기고 즙 받기를 옻칠 받듯 하면
拱把椔殘纔濫觴 공파치잔재남상 - 아름드리나무라야 겨우 한 잔 넘칠 듯.
㔶箱潤色奪髹碧 공상윤색탈휴벽 - 잔이나 상자에 칠하면 짙푸르고 검붉은 색 사라지니
巵子腐腸那得方 치자부장나득방 - 치자의 삭은 안료와 어찌 견줄까.
書家硬黃尤絶妙 서가경황우절묘 - 서예가의 경황지 보다 더더욱 절묘하여
蠟紙羊角皆退藏 납지양각개퇴장 - 밀랍지와 양각도 모두 물러나 숨을 정도
​此樹名聲達天下 차수명성달천하 - 이 나무의 명성이 온 천하에 알려져
博物往往收遺芳 박물왕왕수유방 - 박물지에도 왕왕 그 이름이 올라있지.
貢苞年年輸匠作 공포연년수장작 -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으로 실려 가는데
胥吏徵求奸莫防 서리징구간막방 - 더 내어 놓으라 요구하는 아전들 농간 막을 길 없어
土人指樹爲惡木 토인지수위악목 - 지방민들은 이 나무를 악목이라 지목해서
每夜村斧潛來戕 매야촌부잠래장 -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베었다네.
聖旨前春許蠲免 성지전춘허견면 - 지난봄 성상의 유지로 공납을 감면해 주자
零陵復乳眞奇祥 영릉복유진기상 - 영릉에 종유 다시 나듯 참으로 기이하고도 상서롭다.
風吹雨潤長髡枿 풍취우윤장곤얼 - 바람 불고 비에 젖으면 등걸에서 싹이 돋고
杈椏擢秀交靑蒼 차아탁수교청창 - 나뭇가지 죽죽 뻗어 푸른 하늘빛과 어울리네.
-    출전 : 다산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시문집) 제4권

①궁복산 - 지금의 상왕산을 말한다.
②경황 - 당나라에서 생산된 종이의 한 종류로 노란 물감을 먹인 종이
③납지 - 백랍 먹인 종이
④양각 - 염소의 뿔을 고아 얇고 투명한 껍질로 만들어 씌운 등
⑤영릉복유 -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773∽819)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영릉(零陵)에서 생산되는 석종유(石鍾乳)를 공물로 바치는데, 그것을 채취하기가 너무 힘이 들고 게다가 정당한 보상도 없어 지방민들이 석종유가 다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최민이 자사(刺史)로 와서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은 감복하여 석종유가 다시 생겨났다고 보고하였다는 고사.

지금까지의 기록들로 보아 황칠은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도료로서 명성을 떨쳐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으로 도료로 사용된 황칠의 기록을 살폈는데 과연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하던 시기의 황칠 가격은 어느 정도 였을까?

예용해씨는 『전라남도 민속 공예 현지 조사편』에서 “황칠은 남해 보길도 산의 식물성 기름이다. 나무에서 송진처럼 채취되는 이 황칠은 한말〔斗〕에 100냥 이었다”고 채록한 이야기를 전한다.

『목민심서』를 기록한 시대의 화폐 가치는 지금과 달라서 환산하기는 아주 어려우나 여러 농산품과 집값을 따져보면 1냥이 현재의 50~60만 원 선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금액이 과하다고 여겨서 그 반만 어림하더라도 2~3천만 원은 될 것으로 보이니 당시에도 아주 고가의 도료였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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