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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법화사지는 삼별초 대몽항쟁 주요 거점이었나?

법화사지 사적 지정과 활용 방안 학술회의 역사학계 “완도 장보고 법화사지는 삼별초 대몽항쟁 중심지”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11.15 14:02
  • 수정 2019.11.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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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장보고대사의 창건한 사찰로만 알았던 완도 법화사지가 고려말 삼별초 대몽항쟁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2016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완도 법화사지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학술회의에서 이같은 주장이 힘을 얻어 향후 추가적인 논의가 학계의 이슈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완도 법화사지는 1990년에 도 지정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됐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주름무늬병과 해무리굽청자편·기와편, 고려시대 연화문수막새와 암막새·명문기와·청자편 등을 발견했다.

이후 2016년 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의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7년부터 3년 간 정밀 발굴을 실시한 결과, 사찰의 담장을 비롯한 전체 사역(寺域)이 밝혀졌으며 출입 시설을 포함한 수많은 유적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됐다.

이러한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법화사지의 해양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문화재적 가치를 확인하며, 국가 사적으로의 승격과 보존·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완도군과 장보고글로벌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와 목포대 사학과가 주관해 지난 8일 학술회의가 장보고기념관에서 ‘완도 법화사지 사적 지정과 활용 방안’이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한정훈 교수(목포대 사학과)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학술회의에서 ‘완도 법화사지 발굴조사 현황과 성과’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오정훈 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실장은 “법화사지는 높이 0.5m, 폭 1.2∼1.4m 외곽 담장이 정사각형 모양(둘레 283m)으로 둘려 있었고 내부면적은 5236㎡에 달했다. 담장 터에서 나온 기와 조각은 12∼13세기 고려 시대 양식이 대부분이었으며, 통일신라 시대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유물도 출토됐다. 역사적 사료와 발굴 유물이 일치하는 점을 보면 법화사지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돼 고려 중기 이후까지 지속해서 운영된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완도 법화사지는 통일신라 시대 유물 출토를 근거로 장보고가 창건했지만 장보고가 죽은 후 청해진과 함께 철거됐고 고려 시대에 재건됐지만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다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에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다.이같은 발굴조사 결과발표를 바탕으로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장보고가 창건한 법화사지”라는 금기가 깨지고 본격적으로 공식적인 ‘법화사지와 삼별초의 관련성’을 언급하는 견해가 참석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강봉룡 교수(목포대 사학과)는 ‘한국 해양사에서 완도 법화사지의 위치’라는 기조 발표에서 “완도 법화사지 역시 소중한 부분이 오랫동안 장보고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법화사지를 장보고와 관련시켜 보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법화사지가 고려 후기 항몽사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만약 법화사지를 통해서 삼별초 해양항쟁사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면, 완도는 장보고, 삼별초, 이순신으로 이어지는 한국해양사의 큰봉우리를 온전히 구비한 유일한 장소성을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이번 학술회의의 대한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며 이번 발굴조사 결과에 대해 “법화사지는 장보고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극히 일부나마 출토되었으므로 일단 그 창건 연대는 장보고 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출토 유물의 대부분이 12~13세기로 집중되어 있어, 법화사지의 전성기는 고려후기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아울러 강 교수는 “그런데 법화사지가 절터가 아닐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법화사지에서 절터라는 확증적 유물이 나오지 않았고, 건물 배치도 절터라고 하기에는 매우 이질적인 구도로 되어 있다는 점이 이러한 가능성 제기의 근거이다. 더욱이 완도 향토학자들 중에는 법화사지가 별지에 따로 있을 가능성까지도 언급하고 있어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고 더욱 폭넓은 법화사지와 관련된 논쟁을 언급하기도 했다.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는 이날 ‘삼별초 항전과 완도 법화사’ 주제발표에서 더욱 확증적인 주장을 했다. 주제발표에서 윤 교수는 “법화사지의 조사 결과는 12~13세기가 사원의 중심 운영기이며, 출토유물과 건물지의 조성수법 등에 있어서 진도 용장성 궁궐지와 유사점이 많다. 특히 진도 용장성 출토와 동일한 암, 수막새 기와, 명문 기와는 13세기 후반에 조성된 용장성 궁궐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면서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 초기 지리서에 언급된 완도의 영웅 송징의 존재이다. 특히 송징에 대해서는 17세기 임억령의 서사시로 그 활동과 인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송징이라는 인물이 바로 장보고였다는 학문적 해석에 의하여 근년에 이르러 인위적인 삭제가 지속돼 왔다. 장도의 송징 사당이 장보고의 사당으로 변신한 것도 이러한 인위적 작업의 결과였다. 이는 삼별초와의 관련성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사결과의 고고학적 관견으로는 13세기 후반 화재로 인한 폐사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1271년 진도의 용장성과 동일한 운명을 맞았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거론했다. 

종합토론에서 전영준 제주대 교수(사학)도 “고려 시대 사찰이 관청기능, 요양소, 군대 주둔지 등 궁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봤을 때 법화사지는 진도에 주둔한 삼별초 군을 외곽에서 지원하는 진중사찰(陣中寺刹)로 볼 수 있다”고 윤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법화사지는 9세기 장보고 대사가 창건하여 운영되다가 851년 무렵 폐사, 고려시대 때 중창되어 사찰의 기능을 하면서 송징 장군과 삼별초의 군사 기지로도 활용되었다가 또 다시 폐사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 재창되어 운영되다가 폐사된 사지(寺址)임이 그동안의 발굴 성과와 이번 학술회의의 주제 발표·토론 등을 통해 학술적으로 증명됐다.

또한 완도가 장보고·송징·이순신의 중요한 활동 지역이었고 서남해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한국 해양사의 거점 지역이었음이 드러났으며, 법화사지가 삼별초 항쟁의 중심지임이 부각됐다. 강봉룡 장보고 해양경영사 연구회장에 따르면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완도군에 ‘고려 후기 대몽골 해양항쟁의 거점’이라는 새로운 해양사적 의미가 보태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날 법화사지와 삼별초 관련성 외에도 사적 승격에 대해서 주제 발표를 한 김희태 문화재전문위원은 ‘완도 청해진 유적’ 확대 지정, ‘완도 청해진 유적과 법화사지’ 변경 확대 지정, ‘완도 법화사지’ 신규 지정 등 세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토론에서는 ‘완도 청해진 유적’의 보호구역 확대를 사적 승격의 방안으로 제시됐다.

완도군 관계자는 “법화사지의 사적 승격과 정비 등에 최선을 다하며, 학자들의 고증과 군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여러 여건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법화사 재건을 추진하겠다. 아울러 한국 해양사의 핵심 인물인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고려시대 송징, 조선시대 이순신의 활동과 유적지를 재조명하고 이들을 선양하는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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