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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열셋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13]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1.08 14:18
  • 수정 2019.11.0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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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칠 공물의 폐단을 지적한 호남 위유사 서영보가 올린 별단.

황칠이 무기와 칠기류 및 건축 및 각종분야에 다방면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있으니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완당집(阮堂集)』에 의하면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에 황칠을 한 추녀가 있었다고 한 게 그 것이다.

그리고 특이하게 치마에 황칠로 염색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 7월 7일 3번째 기사 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에 민영규가 삼간택에 사용할 교자와 안복을 준비할 것을 아뢰는 기록에 의하면 “삼가 ‘의궤(儀軌)’를 상고해 보니 삼간택(三揀擇)을 한 뒤에 별궁에 나아갈 때는 지붕이 있는 교자와 안복(按袱)을 사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붕이 있는 교자는 상방사(尙房司)에서 새로 만들어 거행하고 있으며 안복은 대궐에서 우수한 것을 가져다가 모양을 보고 만들면 됩니다. 그것을 담는 궤는 겉은 황칠을 하고 안은 흰칠을 하는 것이 원래 전례인데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황칠 공물의 폐단을 지적한 내용도 있다. 정조실록 41권 정조18년 12월 25일 무인(戊寅) 3번째 기록 1794년에 호남 위유사 서영보가 별단을 올린 내용에 “완도는 바로 황칠(黃柒)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본도의 감영 병영 수영 및 본도의 지방인 강진 해남 영암 등 세 읍에다 모두 연례적으로 바치는 것이 있고 왕왕 더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나무의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금년에 바람의 재해를 입은 후에 큰 나무는 또 한 말라 죽은 것이 많고 겨우 어린 나무만 약간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황칠은 또 한 기물의 수요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마땅히 배양하고 심고 가꾸어 국용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10년을 한정하여 영과 읍에 으레 바쳐오던 것을 아울러 감면하여 오래 자라는 실효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옛날 상태를 회복하여 규례대로 납부하게 된 뒤라도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조목을 세워 일체 금단해서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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