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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과 지금 그리고 경솔한 공론화의 반성

[완도 시론] 박준영 / 법무법인 '새봄' 변호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1.08 14:05
  • 수정 2019.11.0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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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 법무법인 '새봄' 변호사

30년 경찰과 지금의 경찰이 다르고, 30년 전 국과수와 지금의 국과수가 다릅니다. 30년 전 경찰이 놓친 범인 이춘재를 지금의 경찰이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춘재를 잡게 된 근거인 DNA 분석을 지금의 국과수가 했습니다.

지금의 경찰과 국과수는 박수 받을 일을 했는데, 30년 전 경찰과 국과수 직원의 잘못으로 욕을 함께 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앞서 대필 자술서의 의미를 분리했듯이, 30년 전 경찰, 국과수와 지금의 경찰, 국과수도 분리해서 바라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시 윤 모씨와 관련된 감정서를 공개합니다. 공개된 감정서의 문제점이 지금의 국과수를 신뢰할 수 없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증1호(현장 발견 체모)와 증2호(윤 모 씨 체모)는 동일인의 음모로 볼 수 있음”

이 단정적인 감정 때문에 소아마비 장애인인 윤 모 씨를 범인으로 볼 수 없는 수많은 증거들이 무시되고 왜곡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찰과 검사는 수사과정 적어도 현장검증과정에서 윤 씨가 범인이 아닐 수 있겠다는 의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과 이 감정서가 잘못된 수사를 밀어붙이는 근거가 되었다고 봅니다.

1992년 DNA 분석이 도입되었습니다. 1989년 당시 과학수사의 쾌거로 알려진 ‘중성자 방사화 분석법에 의한 범인 특정’은 이 사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과학이 30년 전의 과학을 검증하고 있습니다.

최면조사 그리고 최면조사 시 나온 진술에 대한 보강조사를 마쳤습니다. 검찰 송치 전 경찰의 마지막 조사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젠 경찰의 결과 발표를 차분히 기다리려고 합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 씨는 지금의 경찰을 100% 믿는다고 했습니다. 진범을 풀어준 약촌오거리 사건 등을 경험한 저는 의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윤 씨와 마찬가지로 경찰을 신뢰합니다. 신뢰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직원들은 이춘재 사건이 터진 후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합니다.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큰 만큼 성과에 대한 부담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한계 그리고 당시 경찰의 비협조로 인해 진상 파악이 만만치 않은 것도 현실입니다.

윤 씨는 당시 경찰 5~6명으로부터 폭행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경찰은 당시 수사에 관여했던 경찰들의 30년 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구해왔고, 윤 씨에게 제시했지만, 윤 씨는 한 사람밖에 지목하지 못했습니다. 최면조사과정에서도 이와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지 못했습니다.

진상조사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는 사실의 확인이 중요합니다. 수사기록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남아 있는 일부 기록상의 경찰들을 뭉뚱그려 책임을 이야기하는 식의 결론을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윤 씨에게 자주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당시 경찰이 밉더라도 피해를 과장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경찰이 당시 경찰들의 사진을 제시할 때도 확실히 기억나는 사람만 체크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긴가민가할 때는 ‘긴가민가’라고 옆에 쓰고 있습니다. 윤 씨가 사진을 보고 확실히 기억하는 사람은 1명뿐입니다.

경찰을 두둔하는 제 모습이 저도 어색합니다. 하지만, 억울함을 풀어주는 수사에 힘을 보태는 게 도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3주 동안 사건의 공론화에 신경을 썼습니다. 힘 있게 재심을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주셨고 큰 힘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고생하는 경찰들의 노력이 묻히고 있다는 게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제가 전후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대필 진술서'를 언급한 것은 경솔했습니다.

다음 주에 재심청구서를 접수합니다. 이젠 공론화보다는 재심청구서 등 법정 서류 작성에 힘을 쏟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터뷰를 자제하고 일을 해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최면조사는 기대가 커서 아쉽긴 하지만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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