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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열하나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11]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0.25 11:10
  • 수정 2019.10.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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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제국에서 금칠(황칠)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는 고려사 기록.

몽골제국을 건설한 칭기스칸은 원정길마다 금빛 찬란한 황칠이 칠해진 천막을 이용하였다. 그 리고 『고려사』 세가(世家) 권 제27에 의하면 고려원종 12년(1271) 6월에는 몽골에서 궁궐을 지을 재목을 내라고 요구 하였다. “몽고(蒙古)에서 필도적(必闍赤) 흑구(黑狗)와 이추(李樞) 등을 보내어 궁실의 자재를 찾고 또 한 중서성의 명령[省旨]에 따라 금칠(金漆) 청등(靑藤) 팔랑충(八郞蟲) 비목(榧木) 노태목(奴台木) 오매화(烏梅華) 이등석(梨藤席) 등의 물자를 요구하였다.
이 추 는 상장군(上將軍) 이응공(李應公)의 아들로서 일찍이 몽고로 도망쳐 들어간 뒤 이러한 물자가 고려에서 생산된다고 무고하였다. 황제가 그의 말을 믿고 이러한 것들을 찾았다. (蒙古遣必 赤黑狗李樞等來, 索宮/室之材, 又以省旨, 求金漆靑藤 八郞蟲 榧木 奴台木 烏梅華 梨藤席 等物. 樞上將軍應公之子, 嘗逃入蒙古, 誣奏此物産於本F國. 帝信而索之).” 고 전한다.

그래서 고려 원종은 회보하기를 “우리가 모아두었던 금칠은 육지에 나올 때 모두 잃었으며 그  산지는 남해의 섬들이다. 그런데 요사이 역적들이 왕래하는 곳으로 되었으니 앞으로 틈을 보아서 가져다 보내겠다. 지금은 가지고 있던 열 항아리를 먼저 보낸다. 그 역즙을 만드는 장인은 금칠이 산출되는 지방에서 징발하여.보내겠다. (所用金漆良多, 今遣必赤往取. 竊念, 小邦所貯金漆, 就陸時散盡. 且其所産南方海島, 比爲 逆賊往來之所, 當更乘閒, 往取奉獻. 先將所有十缸以進 ,其瀝汁之匠, 當就産地, 徵來起遣).” 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 1282년 음력 4월 19일에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을 원(元)에 보내어 황칠(黃漆)을 진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황칠은 고려 때에도 금칠이라 하여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제주도산 녹나무 용상에다 황칠을 입혀 중국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금빛을 내었다고 한다. 또 한 『고려도경』에서는 “황칠은 조공품(土貢)이었다”고 하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역사 기록물은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이후로는 중요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온다.

황칠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세종대왕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23년 1441년의 9월14일 천전의(遷奠儀)라는 장례 의식을 하면서 황칠을 칠한 나무비녀와 나무채(紫黃漆 木簪釵)의 사용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도 황칠을 칠한 비녀와 채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숙종 기록에도 또 나온다.

『승정원일기』 인조 25년(1647) 10월 11일 무인의 기록에는 “상탁에 다시 황칠(黃漆)을 입혀 반짝반짝 새것처럼 만들어라.(其床卓改着黃漆).”라고 한 것을 보아 중국 사신을 대할 때도 황칠을 칠한 탁자를 이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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