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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아홉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9]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0.11 09:50
  • 수정 2019.10.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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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281년(고려 충렬왕 7년)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대에는 도성(都城)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밥을 짓는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썼으며 집의 처마와 담들이 이웃과 서로 붙어있으며 노래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고 묘사되고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紀異篇)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시대에 수도인 경주에는 17만 8,936호(戶)가 살았고 행정구역은 1,360방(坊), 55리(里)로 나누어 있으며 금입택이 35채 있었다.(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坊,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 金入宅).” 라고 했는데 실제는 39채가 기록 되었다.

신라의 전성시대란 이제까지 신라의 백제 합병 이후 약 100여 년(654∼780)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성시대는 경주가 수도로서 가장 번성했던 때인데 이 시기는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세운 이후에 상업의 번영을 가져다주어서 가히 제국으로 칭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의 막대한 부가 가져다 준 전성기 즉 헌강왕대875~886)의 기록이다. 

그런데 어느 역사서에서도 위와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본디 나중에 기록된 역사는 살아 있는 권력의 입맛에 맞추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필과 왜곡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 또 한 이제까지 역사가 승리자 위주로 짜서 맞춰지다보니 장보고도 역신으로 몰린 나머지 그 활동조차 함께 묻혀버린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금입택은 황금저택을 말한다. 삼국유사의 금입택 기록은 통일신라의 부유함을 상징하는 근거로 자주 언급된다. 

금입택은 통일신라시대 경주에 사는 왕족을 포함한 대귀족들은 매우 부유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으며 크고 화려한 집을 많이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려했던 대저택 39채가 유명한데 이 저택들을 ‘금을 입힌 집’ 내지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의미로 ‘금입택(金入宅)’이라 불렀다. 그리고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집에 칠을 했기에 금입택이라 했는지 유추할 단서가 발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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