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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일곱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7]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9.27 10:24
  • 수정 2019.09.2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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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금칠(金漆)을 채취하여 철갑에 칠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황자(黃紫)색으로 빛나게 하였으며 5채로 현금(玄金)을 물들여 산문갑(山文甲)을 만들었다”.

“당태종이 정관(貞觀) 19년(645)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갑옷 곧 산문갑(山文甲)에 입힐 황칠을 요청했다”

정관 19년은 당태종 이세민의 연호로써 서기 645년으로 바로 백제 의자왕 5년을 말한다. 이는 삼국시대에도 이미 중국과의 교역에서 황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 알 수 있고 또한 중국의 황제까지 욕심을 낼 정도였으니 그 때에도 상당한 귀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명광개의 실물이 문화재청이 2011년에 실시한 사적 제2호인 공주 공산2성 내성 안마을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단연 으뜸을 차지했던 백제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황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걸작이라 할만하다. 또 한 장보고의 청해진 이전부터 백제에 속한 완도는 황칠이 생산되고 있었음을 반증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가 황칠을 이용하여 목공예품을 제작하고 유통시켰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니 1932년 북한의 평양 낙랑구역 정백동 제27호분 왕광묘에서 목기가 발굴되었다. 

그 중에서 제작 연대가 1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과반의 바닥에는 황칠로 명문이 쓰여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 금석문) 12세기 초 고려 숙종 무렵에 송(宋)나라에서 보낸 사신단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는 손목(孫穆)이 1103년에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당시 통용된 고려말을 사전처럼 풀어 놓았는데 그중에서 “칠을 고려 사람들은 황칠이라 부른다. (漆曰黃漆)”라고 했다. “고려 황칠은 섬에서 나고 본래 백제에서 산출 된다. 절강성 사람들은 신라칠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는 장보고와 연관하여 신라칠로 부른 것으로 판단이 된다.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정창원은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과 재조명 사업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신라시대에는 중국과 교역하는 항로는 한·중을 잇는 가장 오래된 항로였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용이 되었던 ‘북방연안항로’와 ‘황해횡단항로’가 있었으며 이슬람과의 교역이 가능하게 만든 ‘남방항로’는 장보고가 개척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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