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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대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다

[독자 기고] 이승창 / 자유기고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9.06 10:24
  • 수정 2019.09.0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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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창 / 자유기고가

우리들의 위대한 영웅은 불행하게도 오랜 세월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소리 없이 묻혀있어야만 했다.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역사에서 대사를 왕권을 노린 반역자로 몰아서 제대로 된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했던 대사의 발자취가 영원히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대사를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시킨 인물은 일본 대사를 지낸 미국 하버드대의 동양학자인 라이샤워(Reischauer) 교수였다. 그는 1955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엔닌(圓仁)의 당나라 여행기(Ennin’s Travels in Tang China)』에서 장보고를 ‘해상 상업제국의 무역왕’(The Trade Prince of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라 칭송하면서, 대사(大使)를 총독(Commissioner)이라고 해석했다.
 
역사적으로 대사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국의 당서(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및 번천문집(樊川文集)』, 일본의 일본후기(日本後記) 등 한·중·일 3국의 정사(正史)에 모두 기록된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활을 잘 쏘는 소년으로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란 이름으로 알려진 대사는 젊어서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란 직함을 얻어 활동했고, 이후 신라로 돌아와서 해적 퇴치를 위해 군진(軍鎭) 설치를 흥덕왕(興德王)에게 건의해서 1만 명의 군사를 규합하여 828년 완도의 장도(將島)에 청해진을 설치했다.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대사는 당-신라-일본을 잇는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했었다.

필자는 2002년에 일본에 남아있는 대사의 흔적을 따라 연역사(延曆寺, 엔랴쿠지) 등에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하지만 주요 활동무대라고 할 수 있는 적산(赤山)에 대사가 세운 당대 최대 규모의 불교 사원인 적산 법화원(赤山 法華院)을 직접 가본 적이 없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고, 기회가 된다면 꼭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대사의 채취를 느껴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바라던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장보고아카데미에서 추진한 ‘2019 장보고 후예들과 떠난 중국역사기행’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영성시(荣成市, 롱청시) 석도관리구(石島管理區)에 있는 적산 법화원를 찾았다. 일정에 따라 산동성의 성도(省都)인 청도(靑島, 칭다오)시에 도착해서 연태(煙台, 엔타이)시로 이동한 후 하룻밤을 묵고, 목적지인 위해(威海, 웨이하이)시에 여장을 풀었다.

2007년에 개관한 장보고전기관은 중국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고 세워진 최초의 외국인기념관으로, 장보고의 출생과 무령군에서의 활약상•법화원 건립 등 적산에서의 활동과 신라 귀국 후 활동과 최후•장보고의 평가와 한중 교류현황이라는 주제로 수집된 유물 150여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관 벽에 걸려있는 눈에 익은 장보고 표준영정에 눈길이 갔다.

법화원의 주지 스님을 직접 면담하는 행운을 누렸다. 사전에 약속이 되지 않으면 면담을 할 수 없다면서 처음에는 면담을 거절했다. 난감한 상황에서 궁리 끝에 일행이 갖고 간 지난해 답사팀의 스님 면담 사진을 관계자를 통해 보여줬더니 흔쾌히 면담을 받아들였다. 주지 스님과의 짧은 면담시간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지만 정작 장보고 대사에 대한 관심사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적산 법화원에서 장보고 대사의 흔적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무척 중요한 경험이었다. 일정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관련 유적을 두루 살필 수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이번 답사는 장보고 대사의 위대한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직접 살필 수 있었다는데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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