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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후예들, “양꼬치엔 칭따오!” 유명한 산동의 관문 청도로

[기획] 2019 장보고 후예들과 떠나는 중국역사기행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8.30 12:21
  • 수정 2019.08.3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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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때문에 먼저 완도읍으로 나온 섬마을 아이들 12명은 아이들이라 그런지 일반 어른들처럼 내외하는 것도 없이 곧 친해졌다. 다음날엔 태풍 때문에 먼저 온 섬마을 아이들을 숙소에만 두기가 그래서 완도타워 짚라인 타기, 작은영화관 빙그레시네마에서 영화보기 등 몇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나중에 단체 카카오톡 방에 섬마을 아이들 체험 사진을 올렸더니 같이 합류하지 못한 완도읍권과 군외·신지 아이들이 내심 부러워했다는 학부모의 반응이 들려오기도 했다. 다같이 모여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면 좋았겠지만 한정된 예산은 그걸 허락지 않은 것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섬마을 아이들의 뜻밖의 완도읍 여정이 지나가고 8월 12일 출국을 위해 나머지 참가학생들이 저녁 7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간단한 안내교육과 학부모들과의 질의응답과 (사)장보고연구회 추강래 사무국장의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특별강연이 이어졌다. 

추 사무국장은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 훌륭한 인물이 많이 있었지만 한·중·일 동양 삼국의 정사에 모두 기록된 인물은 장보고 단 한 사람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인이자 최초로 바다를 경영했던 진정한 해양인. 장보고의 후예인 여러분들에게는 그 DNA, 즉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이끌 장보고가 될 확률이 크고 높다”며 “자랑스러운 조상 장보고 대사의 도전과 개척정신 그리고 세계를 향한 글로벌 마인드를 배워 21세기 세계를 경영할 수 있는 장보고가 여러분 중에 나오길 기대한다“고 후배들에게 애정 어린 마음을 그대로 꺼내 놓았다. 


밤 11시, 드디어 장보고 후예들 24명은 완도를 뒤로 하고 장보고 대사가 활약한 중국의 산동반도를 향해 출발했다. 

대개 위기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예상하고 찾아온다면 그건 위기가 아닌 것이다. 작년엔 중국 첫 일정에서 야생동물원을 탐방하는데 2명이 사라져 인솔교사들이 마음 졸이다 핸드폰 로밍으로 전화연결이 돼 인근 지역에서 찾았던 위험천만한 사례가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천공항에서 참가학생을 잃어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버스운전 기사가 인천공항 2터미널에 하차시켜 줘야 하는데 1터미널에 내려주고 가버린 것 때문이었다. 비행기 티켓 발급을 위해 여행사 위치를 찾았으나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겨 다시 확인해 보니 2터미널 위치였다. 부랴부랴 다시 버스운전 기사한테 전화를 해 상황 얘기를 하고 태우러 오게 했는데, 그 와중에 인솔교사 1명과 참가학생 1명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2터미널이 20~30분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오전 8시 비행기로 출국하려면 2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데 오전 6시를 넘기고 있었다. 

혹시 화장실을 갔나 싶어 화장실 안에도 들어가 봤지만 헛일이었다. 고객센터에서 방송을 한번 해달라고 해야 겠다는 생각에 인솔교사 1명은 거기에서 잃어버린 참가학생을 본인도 놀라 문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먼저 버스에 올라타게 하고 나머지 인솔교사들이 잃어버린 학생들을 인천공항 안에서 찾기 시작했다. 애가 타고 있는데 그때 마침 구세주처럼 잃어버린 학생 학부모가 운영위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D구역 은행 앞에서 우리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맨끝 H열에 있다가 젖먹던 힘까지 내서 뛰어가니 다행히 참가학생이 보였다. 인솔교사들은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이후 참가학생들은 조별 단위로 각 조별 인솔교사 중심으로 인원파악 등을 확인하도록 조치됐다. 작은 단위에서 빠르게 인원파악을 하기 위한 조치였다. 원래는 중국에 도착해 운영할 방식이었지만 인천공항에서 터진 사건은 인솔교사들에게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40분 정도 비행기를 타고 중국 청도(칭다오) 공항에 도착했다. 국제적으로 청도는 1903년에 독일 정착민들에 의해 생산이 시작된 칭다오 맥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한 코디미언이 “양꼬치엔 칭따오”라고 해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도시다. 또한 거대 백색가전 제조업체인 하이얼과 주요 전기 회사인 하이신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청도는 산둥 반도 남부에 위치한 산업 도시이며, 군항이다. 면적 1만1026km², 인구 838만명이다. 지역의 이름을 딴 청도맥주와 라오산의 깨끗한 광천수로 유명한 도시이다.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로서, 지방 정부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산둥 반도의 항구는 북부에 집중했다. 그중 청도는 교오로 불렸고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청나라 말기인 1891년에 이곳이 군사시설이 건설되면서 발전이 시작되었다. 청일 전쟁 후, 삼국 간섭으로 중국을 삥뜯었던 독일은 1897년 청도 일대를 조차하면서 산둥 반도 일대를 세력하에 두었다. 1898년 독일에 의해 개항된 이후 급속도의 성장을 이루었고, 그 영향으로 도시가 마치 작은 독일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중국 속의 유럽'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청도에 남아 있는 서양풍의 건물이나 청도 맥주는 당시 독일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장보고 유적이 있는 산동성의 관문으로 들어온 청도에서는 해외문화탐방 차원에서 참가학생들과 청도맥주박물관, 잔교, 팔대관, 5·4광장을 둘러봤다. 


독일의 기술을 그대로 전수받은 제조 기술과 풍부한 수자원이 만나 환상의 맥주 맛을 자랑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청도맥주. 그 100년 동안의 역사와 제조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청도맥주박물관이다. 무료시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참가학생들이 입맛을 다시는 바람에 인솔교사들이 혼쭐이 났다는 후문이...

청도 5·4 광장은 청도 신시가지의 랜드마크로 여행자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길을 찾는다. 청도는 5·4운동의 발단이 된 것을 기념하며 조성된 공원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다. 중국 5·4 운동은 1919년에 조선의 3.1 운동(1919년)에서 받은 영향과 그 이외에도 러시아 혁명(1917년)의 영향을 모두 받아 중화민국에서 확산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에 변화가 발생하는 사건이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서도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또한 근·현대사에서도 중국의 중요 사건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5·4광장은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하여 현재는 시민들의 쉼터로 아침, 저녁으로 산책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인 횃불 모양의 ‘오월의 바람’은 바람을 붉은색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해가 지면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가지 색 조명이 비춰 더욱 아름답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은 잔교였다. 잔교는 440m의 교량 끝에 중국식 정자(회란각)가 있는 청도 대표 여행지다. 청나라 시절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군수 물자를 공급받기 위해 만들어진 다리로 1891년 건설된 후 전쟁 때 폭격 당한 후 1931년에 재건되었다. 낮에는 여행자가 넘쳐나 제대로 사진을 찍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곳인데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도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밤엔 신시가지의 아경과 밤바다를 볼 수 있으며, 사람도 낮보다 현저히 적으니 밤에 가는 것도 좋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다음 일정이 바쁜 우리 일행은 잔교를 뒤로 하고 팔대관으로 향했다. 

팔대관은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와 유럽식 건물이 모여있는 지구인데, 과거 칭다오에 머물던 유럽인들이 별장을 지어 머물렀으며, 이후 이곳에 중국 유명인들이 머물면서 유명세를 탔다. 8개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지만, 현재는 10개의 길이 있다. 대부분 건물은 입장이 불가능하며, 화석루만이 유일하게 입장 가능하다. 아름다운 풍경 때문인지 웨딩 촬영하는 현지인 커플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청도 잔교에서는 박창인 참가학생의 외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창인 군의 어머니가 중국 청도가 고향인데 외할머니가 외손주가 한국에서 넘어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인근이 집이라 직접 찾아온 것이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창인 군은 외할머니와 다정한 시간과 할머니가 주는 용돈을 건네 받고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손주 사랑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새벽같이 출발해 인천공항에 도착하느라 다들 피곤했다. 청도 일정은 맥주박물관이 가장 인기가 있었으나 나머지는 아이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노화에서 온 은찬이가 “장보고는 언제 보는 거에요?”라고 한 인솔교사에게 묻기 시작했다. “은찬아, 내일부터 그 답이 나올거야. 참고 기다려 보자!”하며 일행은 다음 일정을 위해 중간 숙소인 연태를 향해 몸을 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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