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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린의 고향 중국 광저우 운안구와 교류협력 강화해야 되는 이유

[기획] 진린의 고향 광저우를 가다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7.15 17:43
  • 수정 2019.07.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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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있다가 명나라 수병도독(모든 수군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장수) 진린이 나와서 남쪽으로 내려와 이순신의 군대와 합쳤다. 진린은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다. 우리 임금께서는 그를 내려보낼 때 청파(서울 용산에 있던 마을 이름) 들판까지 나와서 전송했다.

 진린의 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을의 수령을 때리고 욕했다. 찰방(역참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 이상규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녀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나는 통역관을 통해 풀어주도록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대신들에게 이런 사정을 말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순신의 군대가 앞으로 싸움에 질 것 같습니다. 진린과 함께 군대에 있으며 하는 일마다 억눌리고 의견이 맞지 않을 것입니다. 진린은 이순신의 권한을 빼앗고 우리 군사들을 함부로 괴롭힐 것인데, 이를 거스르면 화를 낼 것이고 따라주면 제 마음대로 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일본군과 싸우면 이순신의 군대는 질 것이 뻔합니다."
여러 대신들은 내 말에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탄식만 할 뿐이었다.(중략)

 위의 내용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전시(戰時) 재상을 맡았던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 나온 진린에 관한 기록이다. 

 징비록에 의하면 류성룡을 비롯한 많은 조정의 대신들이 '충무공이 진린의 횡포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고, 분명 명나라 군대와 갈등이 생길테니 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며 우려를 표했다. 

 징비록의 기록은 420여년의 역사 동안 진린을 용맹하나 포악한 인물로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물론 최근에 이에 대한 반발 기류도 역사학계에 등장했다. 완도군도 지난해 9월 ‘완도 묘당도 관왕묘 및 진린 장군 재평가 학술용역’최종 보고회를 개최해 진린에 대한 재평가를 도모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 중국 베이징 대학 강연을 통해 과거 조선과 명나라가 힘을 합쳐 왜군을 격퇴한 임진왜란을 거론하면서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의 우정과 공조를 부각시키면서 “한국의 완도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지금 진린 장군 후손들 2천 여 명이 살고 있다”고 언급한 것이 재평가의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완도 사람들에게, 특히 고금도 사람들에게 진린은 남다르다.  
1598년 진린은 조선으로 오면서 배 위에서 관운장이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된다. 중국에서 관운장은 수호신으로 숭배되는 인물이다. 진린은 곧 꿈속에서 보았던 관운장의 모습을 비단에 그리게 하고 제사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선조 31) 2월 18일 수군 8천여 명을 이끌고 고하도(高下島)에서 고금도로 옮겨와 묘당도에 진을 쳤다. 진린이 명나라 전선을 정박시키고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합동작전에 들어간 곳이 고금도다.진린은 고금도에 도착하자마자 고금도 곁에 있는 조그마한 섬인 묘당도의 용금사 아래에 사우를 건립토록 했다. 진린이 고금도진에 도착한 때는 1598년 7월 16일인데 사우가 완성된 것은 두 달 만인 9월이었다. 몹시 서둘렀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촉박하였던 관계로 관운장 상(像)은 흙으로 빚어졌다.

 진린은 부하들과 함께 백금 수백량을 내 사우를 짓는 한편 남은 돈은 고금도 주민들에게 주어 제사를 모시도록 조치했다. 묘량도의 관왕묘는 이런 연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진린은 고금도 주민들에게 제사비용을 다시 건네주면서 해마다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완도군은 진린도독이 정유재란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완도 고금도 주민들에게 제사비용을 건네주면서 관왕묘에 제사를 모시라는 약속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지난달 19일 중국 광동성 운부시 운안구 정부회의실에서 열린 완도군과 운안구 정부 양도시간 문화·경제교류협의를 위한 간담회에서 울려 퍼진 이서 완도문화원 사무국장의 외침은 중국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의 정유재란 활동의 인연의 본향은 완도군이니 한국의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교류협력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항의성 발언이었다.  

 완도군과 진린의 고향 광저우 인연도 인연이지만 한국에 있는 진린의 핏줄인 광동진씨 해남군종친회 진현모 위원장의 중국(광동성) 문화·경제교류단 합류는 천군마마였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애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과 싸우다 죽었다. 진구경의 아들 진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로서 일하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조선으로 귀화, 고향인 광동성에서 본관을 따와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즉, 진린의 직계 후손은 현재 한국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마을을 황조리라 하며, 진린을 모시는 황조별묘(黃朝別廟)가 세워졌다. 해남 산이면 광동 진씨 집성촌이 바로 그곳이다. 

 운안구 정부에서 수출 상담회는 광동진씨 종친회를 만나는 것부터 시작됐다. 운안구 정부가 속해 있는 광저우 운부시는 인구 294만명의 도시로 진린의 후손들이 집거하는 집성촌인데 회원이 9만명에 이르는 광동 진씨 종친회의 영향력이 큰 곳이었다. 

 진형모 위원장은 “이번 교류도 핏줄로 연결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그냥 가서 해주라고 해서 되는 곳이 아니다. 그만큼 광동진씨 종친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영향력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협력이 가능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올때는 중국 수출 판로 확대가 주요 목적이었던 완도군청 조승호 수산유통 팀장은 광동진씨 종친회를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수출 판로 확대는 문화교류가 진척되고 광동진씨와 깊은 관계가 맺어지면 완도군의 수산물 수출전진기지로 역할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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