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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계속되고 있다!

[언단의 장] 5.18 역사 순례단 체험 후기 / 신가영 <완도고 2학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6.10 08:38
  • 수정 2019.06.10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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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가영 / 완도고 2학년

광주 시민들이 죽었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시민들은 피를 흘렸고 당시의 참혹함은 비통함에 금할 길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39년 전, 1980년 5월 18에 일어난 일이다. 18일 0시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 활동 중지와 옥내외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 사전 검열, 대학 휴교령 등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이 진행되었다.

광주에서는 전남대 정문에서 등굣길을 제지하던 계엄군과 전남대생 사이에서 민주화운동의 실마리가 발생했다. 전남대생들은 계엄군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화적이고 자연스러운 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고 이것은 5.18민주화운동의 최초의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달아나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무차별하게 시민들의 집을 쳐들어갔고 시민들과 학생들은 금남로 일대로 몰려들었다.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과 군경들이 충돌한 지 30분이 지나서 트럭 30여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였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란 이름으로 군경은 남녀불문 무차별 구타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 3일째, 광주 시민들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시내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가 충돌이 일어났고 시민을 향한 최초의 발포 형성되었다. 시민들은 굴복하지 않고 절정을 향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참혹한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초의 희생자 김경철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여서 희생되고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어지며 전남대 교내, 교도소에서는 구타와 암매장이 있었다.

또한 5월 21일 오후에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대규모 집단 발포하였다. 22일 주변 지역의 시위대와 광주시위대는 계엄군과 맞써 싸워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워진 질서를 회복했다. 계엄군은 일 시각 하였지만 이미 일어난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다. 이렇게 10일의 몸싸움은 마무리 되었다.

5.18민주화 운동은 현재까지도 많은 피해가 있다. 당시 5.18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공포와 피해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광주 5.18국립 지에는 무모하게 희생되었던 희생자들이 뭍혀 있고, 금남로에 위치한 5.18기록관에는 당시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39년이 지난 지금 그곳을 방문 하였을 때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당시에 느꼈던 고통들과 광주시민들이 주는 교훈을 받을 수 있었다. 5.18망언과 당시를 부정하는 일부 세력의 뻔뻔함에 우리는 기억하고 계승하여 후손들에게 진실된 5.18민주화 운동을 알리기 위해 절실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도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야 한다. 많은 희생자와 피해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민주화를 위해서 말이다. 지금도 5.18민주화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편집자 주> 본지 지령 1184호 언단의장은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을 맞아 518 역사 순례단의 체험 후기로 작품성을 가진 몇 편으로 꾸려졌으며 우수작으로는 완도고 1학년 김현수, 박철진, 김다은, 최예원, 김순주, 박지영 학생/ 2학년 김성일, 김지현, 신가영, 추수희, 선윤아, 김동인 학생이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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