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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가

[금당 특집] 2. 서길수 과장과 떠난 금당 8경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9.05.19 16:00
  • 수정 2019.05.1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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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 세포 전망대에서 바라다 본 고흥 금산 방향.

2차 세계대전, 독일 포로 수용소에 갖혀 있던 사람이 함께 있던 사람들이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는데도, 창살 밖으로 해가 지는 붉은노을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가?'라고 했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름다움의 끝이 그곳에 있었다.
보는 순간, 이건 뭐!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붉은심장 가장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순식간에 깨어나면서 너무나도 심히 요동쳐 인간이 아름다움에 대해 느낄 수 있는 혈관이란 혈관은 모조리 떨리게 했던 마법 같은 순간.
그는 작심한 듯 했다. 이걸 보여주려고.
완도군청 서길수 여성아동과장과 동행한 금당도.

완도군청 여성아동과 서길수 과장.

본래 이 장은 금당면 출신 인사의 결혼이야기로 꾸려질 예정이었고 인물로는 본 면 출신인 서길수 과장이 딱이었다.
더구나 그의 아내는 현재 청산면 총무계장으로 재임 중인 미모의 박경자 계장.

샤프하고 소신 있는 서 과장과 옥빛처럼 빛나는 자태를 가진 박 계장이 참으로 어울리는 한쌍이다싶어 원고청탁을 부탁했더니 "너무 열없다(부끄럽다)"는 서 과장의 말에 그의 아내에게 부탁하려 청산도까지 찾아가 설득 해보았지만, 부창부수다.

그렇게 원고청탁을 고사한 서길수 과장이 하는 말. "그러면 대신에 직접, 금당면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주말을 맞아 그와 함께 찾은 금당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 날씨 또한 올 봄 들어 최상의 하늘빛으로 찬란함을 넘어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다.
서 과장은 "완도김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나올만큼 유명했는데, 해방 이후 대일본 수출 1호가 바로 김이었다"고 했다.
"완도군 읍면 중, 금당면이 김 생산을 가장 빨리 했는데, 당시 김 생산은 연안 뻘밭에다 말목으로 소나무와 참나무를 박고 자연 채묘를 해서 대나무발에 이식한 다음 아직은 노끈이 나오지 않아 짚새끼줄로 엮어 지금에 비하면 생산 과정이 훨씬 복잡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김 한톳의 가격이 쌀 한가마니 가격으로 김은 금값이었단다. 지금의 협동조합 격인 어업조합도 금당에서 가장 먼저 생겨났다고 했다. 또 김을 경매하고나면 어민들은 즉석에서 두툼한 현찰 다발을 받았고 이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다, 잘못해 500원짜리 지폐 한 두장이 빠져나가다보면 어판장을 오가며 김을 주워먹던 개들이 떨어진 500원짜리가 김인 줄 알고 실제로 5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고.

그때는 김값이 워낙에 좋아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라 김발 옆에다 움막까지 지어 생활하곤 했는데, 그 움막은 형님 누나들이 밀애를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였고, 그러다 애가 생기면 결혼을 하게 돼 한 마을에서 시집 장가가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서 과장은 6남매의 막내로 어릴 땐 귀여움을 독차지했지만, 형과 누나가 장성해 한 명씩 외지로 나가다보니, 급기야는 막내였던 자신만 남아 6명의 일을 모두 하게 되었고, 논밭가는 쟁기질이며 노젓기까지 도맡아 했는데 쟁기질 중엔 감자둑 만들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이곳 금당면의 간척 공사는 일제강점기에 대거 이뤄졌는데, 해방 이후 일본인 지주가 떠나면서 소유권을 놓고 황해도 해주 사람과 15년에 걸쳐 소송을 한 후 마침내 승소해 금당 사람들에게 분양됐다고 했다.

금당면은 임진왜란 이후 효종 때부터 사람들이 입거해 서씨, 송씨, 이씨, 박씨 순으로 들어왔고, 장흥 보성 고흥 완도가 경계하는 해상 교통의 절대 요충지라고 했다.
그렇게 경계에 있으면서 고흥 녹동이 주요생활권이다 보니, 한 때 이곳 사람들은 금당도를 고흥으로 편입시켜달라고 청원까지 했지만, 결국 완도군의회에서 금당면이 고흥군으로 편입되면 완도군 전체의 해역이 좁아들어 반대하면서 일단락됐다고.

금당면은 1990년대까지만 하루 두차례 배가 다닐 정도로 배편 상황이 열악해 군청 회의에 참석할려면 2박 3일이 걸린다고 했고, 금당 사람 중 절반은 완도읍에 발을 딛지 않았을 것이라고.

공무원들 또한 금당면은 읍권과의 교통편이 너무 불편해 서로 안갈라고 해 지금까지도 공무원의 유배지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했다. 서 과장은 1989년도 완도군청에 들어오고나서 첫 부임지가 청산도였는데, 금당면으로 가고 싶다고 하니 인사담당자마저 "모두가 안 가려 하는 곳인데, 네가 간다고 하니 기특하다"며  오후에 다시 금당면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바닷가를 낀 행정기관에서 가장 어려운 점 하나는 바다 위에서 시신이 떠오를 때라고 했다. 시신 수습은 해당 해역 공무원이 처리해야 했기에 금당 앞바다에 처음 시체가 떠올랐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고흥으로 떠내려가라고 바랬지만 결국 금당 해역권으로 들어와 직접 처리에 나섰는데 거제도에서 갯바위 낚시를 하던 낚시꾼이 실족사해 떠밀려 온 것이었다고. 지금까지 총 7번의 시신 수습을 해봤는데, 처음엔 귀가해 잠도 이루지 못할만큼 꺼림칙했지만, 나중엔 고인의 명복까지 빌어주면서 복짓는 일이라고 여기게 됐다고.

금당면 출신 인사로는 완도교육청 초대 교육장이었던 송희석 전 교육장을 꼽았는데, 순천시의 금당고가 이곳 금당면과 인연이 깊다고 했다. 송희석 교육장은 재임 당시, 금당면에 고등학교를 세우기 위해 학교 설립 인가까지 모두 끝마쳤는데, 인근 순천시에서도 학교설립을 위해 분주했지만 인가를 받지 못해 결국 인가 된 금당고의 이름을 쓰는 조건으로 인가권이 순천으로 넘어가 개교하게 됐다고. 또 보성 출신으로 알려진 박주선 국회의원의 아버지 고향이 이곳 금당면이고, 대중 가수 거미가 이곳 출신인데 거미의 엄마는 음악 선생으로 자신이 이루진 못한 꿈을 거미에게 불어 넣어 준 것 같다고 했다.
녹두장군 동학으로 유명한 전남대 송지숙 전 교수 또한 이곳 출신이란다.
 

금당면 청와대.

금당면에는 부자들이 여럿 있어 청와대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금당면사무소 옆에 자리한 기와집을 가리키며 저곳이 금당면의 청와대라고 했다. 멀리서 바라본 금당면의 청와대는 사대부가의 전유물인 솟을대문까지 제법 갖춘 모습이었다.
 

남해루 장어탕. 말린 무웃잎에 된장을 풀어 끓인 맛이 일품이다.

금당면의 맛집은 남해루. 일식 한식 중식 모든 요리가 가능한 종합요리점으로써, 날씨가 창창한데도 손님들로 미어터질만큼 많았다. 된장을 풀어 넣어 갖은 야채와 양념을 버무린 장어탕과 금당 앞바다에서 잡았다고 하는 쏨팽이 튀김이 일품.

남해루 식당의 또하나의 일품맛인 쏨팽이 구이.


금당면은 장흥과 가까워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였던 장흥 석대들 전투 이후 패전한 농민군이 이곳 금당면으로 들어왔고 항일운동과 이어지는 한국전쟁까지 이데올로기 시대를 거치며 의식이 깨어 있는 지역으로 좌익계가 많았다고. 1960년대 금당면 무장공비출몰사건 또한 이곳 출신 중에 월북한 이들이 고향에 다녀가고자 내려온 경우라고.

서 과장의 꿈은 원래 소설가였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들어왔던 동학농민군과 항일 운동, 그리고 빨치산 이야기를 습작으로 써뒀는데, 이를  아버지가 보고나서 불에 태워 버렸단다. 완도중학교 2회였던 아버지는 "한국전쟁과 좌우익의 이야기는 지역사회가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야할 이야기지 꺼내야 할 이야기는 아니다"고.
 

그의 말을 들으며 이제, 금당의 자랑 부채바위며 병풍바위를 보려 바다로 나가려는데 때마침 고흥에서 띄운 유람선이 금당 해역을 지나가자, 서 과장은 저 배만 보면 "속이 안좋다"면서 "하루 속히 완도에서도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금당 바다.
눈을 뗄 수가 없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마치 축복처럼 다가왔다가 새벽의 그림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처럼.
세상에 존재하고 존재했던 온존재가 온힘을 다해 지금 이순간으로 모이고 모아졌을 때, 탄생하는 마법 같은 순간으로
그곳은 축복, 그곳은 은총.
그곳은 바로 금당.

돌아오는 길, 지난해 변환소 문제와 관련해 담당과장을 문책하라는 완도신문의 논평에 서운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서길수 과장은 "언론이 잘못 보도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정책에 책임을 지는 건 참모라면 당연하다. " "완도군의 주체는 주민이고, 공무원은 객체로서 주민을 위해 존재한다. 주민을 위해 존재하지 못할 때 비판 받는 건 당연하지만 내 이야기가 미화되는 건 부끄럽다. 결혼이야기를 고사한 이유였고, 찬사 받는 곳에 내 이름이 나오지 않아야 할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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