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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항일운동의 씨앗, 대한제국 황준성 대령

[특별 기고] 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5.19 14:44
  • 수정 2019.05.1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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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완도 항일의병장 황준성(黃俊聖 1878-1910).
완도항일운동을 세대별로 구분하면 항일운동의 씨앗은 제1세대 황준성이 뿌리고 제2세대 박영희, 오석균, 송내호, 이사열, 정남국 등은 항일운동의 초석을 다져주었으며, 제3세대 장석천, 이기흥, 김영현, 임재갑 등은 항일 저항운동(抵抗運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교육이었다.

제1세대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황제의 퇴위와 대한제국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항거했던 군인들은 전국각처에 유배되었다. 그 군인들이 의병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는 무장투쟁을 하였다. 역사는 이것을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 한다.

1907년 12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따라 완도에 유배되었던 사람은 죽청리에 대령 황준성, 군외면 황진리에 소령 이철허(李徹虛) 대위 추기엽(秋期燁)이 배소되었다.

죽청리에 배소된 황준성은 군인이지만 한학이 출중하여 완도향교에서 훈장으로 추대하고 학동을 가르치는 일은 맡도록 했다. 당시 나이는 29세였으며 혈기왕성한 항일투사였다. 완도에서는 지금까지 황대령으로 부르고 있다. 황대령이 항일 투사가 되었던 것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던 대한제국 군인들은 전국에 유배되어 그 지역에서 항일투사가 되었던 것이다.

군인이였기 때문에 소총으로 무장하고 일본 군인들과 전투를 하였다. 그러나 기관총 앞에 소총은 총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을 규합하기위해서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불교사찰과 천주교 성당이나 교회에서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의식적으로 항일의 의지를 철저히 교육했다.

황대령은 완도향교에서 죽청리 박영희를 만난다. 이 때 박영희는 죽청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있던 시기에 완도읍에서는 완도사립육영학교가 생겨 3학년 졸업생이 나오는 시기였다. 황대령은 박영희를 비롯하여 1회 졸업생 고금도 이사열과 2회 졸업생 소안에 송내호와 자주 교류하면서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황대령은 대위 추기엽과 1908년 3월 3일 완도에서 해남으로 건너갔다. 항일의병조직을 가지고 있던 강성택을 만나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다음 달인 7월에 미황사에 집결되어 있던 추기엽 황두일 의병부대를 하나로 결집하여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300여명의 의병을 확보하게 된다. 이 소식은 일군에 접수되었다. 추기엽은 내분에 의해 사살되고 황대령은 그해 10월 해남대흥사 심적암에서 일경의 야습을 받고 의병 300여명이 사살 또는 부대가 해산되고 몸은 피신하였지만 1909년 12월에 일경에 채포되었다. 1910년 2월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다음해 1910년 5월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1986년 황준성은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고 추기엽은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황대령은 완도에서 출정하여 해남에서 의거 하였지만 완도병력으로 의거한 기록은 없다. 후손들의 이야기를 모아본 결과 김영현과 박영희, 오석균은 황대령을 따라가기를 원했지만 만류하였다. 당시 김영현은 27세 박영희, 오석균, 송내호는 17-18세 이였기 때문에 황대령은 “ 내가 가는 길은 아주 위험하다. 너희들은 남아서 더 큰일을 해라.” 

부족한 기록을 검토하고 후손들의 이야기를 모아본 결과 죽청리 박영희와 군외면 영풍리 오석균과 불목리 김영현이 완도에서 자금책을 맡아 했다고 한다. 남아 있는 가록은 한국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에 “완도에서 4개리의 이장을 소집하여 의병자금을 모집하고,”라는 것과 후손들의 이야기가 일치한다. 황준성이 뿌린 씨앗을 썩지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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