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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전개 배달청년회, 완도군 청년회의 ‘모태’[완도군청년회-완도신문 공동 청년프로젝트] 완도 근현대사 한축 담당 청년회 역사 찾기
박주성 기자 | 승인 2019.05.07 21:12
송내호 선생 약력.
정남국 선생 약력.


편집자 주> 원래는 이번 호에 ‘해방 전후 완도청년단체 활동’을 주제로 완도군청년운동사를 정리하려 하였으나 항일운동이 민족사적 최대과제인 일제강점기에 완도군청년회 창립의 모태 역할을 한 소안배달청년회를 건너 뛰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소안배달청년회 창립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 한다. 

소안도에서의 조직적인 항일민족운동은 비밀결사인 수의위친계 결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수의위친계는 1914년 송내호의 주도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송내호는 애국계몽인사들이 설립한 서울 사립중앙학교에 1911년 17세로 진학하였다. 그는 3년간의 중등과정을 마치고 1914년 이 학교를 6회로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고향 소안도에 내려온 그는 사립중화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교육운동에 뛰어 들었다. 애국계몽인사들이 설립한 사립중앙학교의 영향이 컷던지, 소안도 민족항일운동 조직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비밀결사 수의위친계를 가장 먼저 결성하고, 소안도의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1915년 소안배달청년회가 조직됐다.

‘일제하 소안도의 항일민족운동’ 논문을 쓴 박찬승 교수는 소안배달청년회 창립과 관련해 1920년 창립설을 취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송내호와 정남국 두 사람의 장례 때 그간 살아온 기록을 요약한 약력과 이월송의 증언을 종합하면 1915년으로 취하는게 옳을 것 같다.

당시 박 교수는 “이월송 옹은 배달청년회가 창립된 시점을 1915년으로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배달청년회사건 재판기록>에는 192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1920년은 전국에서 지·덕·체를 함양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청년회가 창립되었던 해였으며, 1915년에는 그러한 청년회가 존재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1920년 설을 취했다”고 그 근거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 송내호 선생 약력’과 ‘고 정남국 선생 약력’을 살펴보면 송내호가 배달청년회를 조직했다는 사실과 정남국이 1915년 배달청년회 부회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조직한 사람이 송내호이니 회장은 당연히 송내호로 추측이 가능하며, 1915년 배달청년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되는 대목이다. 여기에 이월송의 1915년으로 창립시점을 들었다는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에서도 얘기했지만 일제강점기 애국지사들의 최대과제는 항일운동과 일제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애국계몽인사들이 설립한 사립중앙학교를 졸업한 송내호도 바로 이러한 민족적 과제를 앞장서 해결하고자 했던 애국지사로서 그의 실현을 위해 비밀결사 수의위친계와 소안배달청년회를 조직하고 밖으로는 해외까지 이어지는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안으로는 완도에서 항일운동 교육과 항일운동 전개를 위한 조직사업에 열성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완도읍을 비롯한 그 외 지역 청년회 조직화가 현재의 청년회 역사로 귀결되어 졌다고 보여진다.

이후 배달청년회의 활동은 박찬승 교수의 논문 내용에 잘 정리돼 있다. 
배달청년회는 창립 초기에는 소안도의 유지·청년들이 포함된 창립된 것이었으나 1923년경 참여하고 있던 면장과 연장자가 모두 탈퇴하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청년회로 개편된다. 이는 1923년경 기존의 명망가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기존의 청년회들을 진보적인 청년회로 개편하려는 청년회 혁신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혁신 이후 1927년까지 배달청년회의 회원과 간부명단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강정태, 신준희, 최형천, 송내호 등이 이 회의 회장 또는 부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달청년회는 1923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에 강정태(강사원), 신동희, 신우승을 파견하였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는 주지하듯이 기존의 부르주아적인 청년운동을 사회주의적인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의 안건토의 내용에는 “전조선청년단체는 다수자인 무산계급 및 노동계급 해방의 선구가 되어 민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배달청년회원들이 이같은 성격의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석하였던 것은 이후 배달청년회의 활동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후 강정태·송내호·정남국·박흥곤·송기호 등 소안청년회의 핵심멤버들은 소안면에서도 배달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여 각 리에 노동단체를 조직하고 이를 연합하여 회원 약 7백명을 포용하는 ‘소안노동연합대성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3년 8월경에는 당시 완도군내에 있던 7개의 청년회와 9개의 노동단체를 연합하여 완도청년연합회 및 완도노동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 단체가 서울에 있는 조선청년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광주에 있는 전남청년연합회와 전남노농연맹의 강령과 결의사항을 지도정신으로 하여 활동을 전개하도록 유도하였다고 한다.

한편 배달청년회의 일상활동을 살펴보면 1923년 11월 24일에는 지육부 사업으로 문화발전을 촉진키 위하여 소안학교 추기대운동회와 연합하여 같은날 소안학교에서 학생들의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배달청년회는 정기적으로 정기총회와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는데, 1925년 10월 17일 정기총회의 경우 회원교양에 관한 건, 부인 및 소년지도에 관한 건, 노농동운에 관한 건 등이 논의되었으며, 같은해 11월 8일에 열린 집행위원회에서는 도초도 소작쟁의에 동정금을 모금하여 보낼 것과 25세 이상의 연령자를 특별회원으로 입회케 할 것, 그리고 신동희로 하여금 회가를 기초케 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또 1926년 1월 10일의 정시총회에서는 회비징수, 전남청년연합회 문제 등을 논의하였으며, 기타 무안군 자은면 소작쟁의에 격려전문을 발송할 것, 노화면 청년운동을 적극 후원할 것, 소안 소년단 순회강연대를 후원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상에서 배달청년회는 회원교양 등 자체 사업 외에 대외적으로 각지의 소작쟁의에 대한 지원과 완도 내의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에 대한 지원에도 힘을 쏟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배달청년회는 자신의 회관, 즉 배달청년회관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곳에는 사회주의 관계 서적들을 비치하고 독서회도 조직하여 회원들의 현실인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배달청년회원들의 활동은 이러한 배달청년회 자체의 활동보다도 소안도 내의 농민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에 회원들이 적극 참여 혹은 지원하는데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소안사립학교 부설 중학강습소나 면에서 열린 강화회 등을 통하여 청년층에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배달청년회는 1927년 5월 소안사립학교 폐쇄 사태에 대응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6월 7일 임시총회를 위한 집회계를 경찰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완도경찰은 청년회에서 학교문제를 토의할 이유가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집회를 허가하지 않았다. 배달청년회 측에서는 당시에 존재한 사회단체에서 교육문제를 논의함은 당연하다고 항의하였으나 완도 경찰서장은 배달청년회는 법률에 인증치 않은 단체이므로 불허한다 하고 집행위원회 회의까지도 금지시킴으로서 배달청년회는 소안학교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한편 배달청년회는 1927년 8월 28일 완도청년동맹의 결의에 따라 해체하게 되어 이를 위한 총회를 11월 26일 소안학교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소안도의 배달청년회는 중앙의 신간회 창립 이후 조선청년초동맹이 지방의 각 부군에 하나의 청년동맹을 두고 그 아래 각 면에 지부, 리에 반을 조직하는 방향으로 청년운동조직을 개편한다는 방침에 따라 완도청년동맹 소안지부로 개편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해체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집행위원 최평산이 청년회원으로서 하기휴가로 소안도에 와 있던 와세다대학생 이정동에게 발전적 해체의 취지를 담은 선언문을 부탁하였다. 이에 이정동은 <선언>이라는 글을 써서 최평산에게 주었고, 최평산은 해체총회에서 이를 배포하기 위해 25매 인쇄하여 준비하였다. 경찰은 이 선언문이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는 구실을 씌워 청년회 간부들을 대거 구속하여 이른바 ‘배달청년회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빌미가 된 <선언>은 세계정세 속에서 조선무산계급의 운동, 민족해방운동이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 위에서 운동전선 내부의 파벌의 청산과 운동 진영의 중앙집권적 체제로의 개편 등을 당위로서 제시하고 있다.

또 1927년 신간회 창립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물론 이 선언문은 일본유학생에 의해 씌여진 것이었지만 그가 소안도 출신으로 배달청년회원이었음을 고려할 때 소안도 항일운동의 이론적 수준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안도의 청년운동은 이 <선언>이 빌미가 되어 배달청년회의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해방 전후 완도청년단체 활동'을 주제로 연재 됩니다.>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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