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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차인들, 범해와 응송!

[완도차밭, 은선동의 茶 文化 산책-57] 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22 08:51
  • 수정 2019.03.2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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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는 단연코 조선 후기의 초의선사다. 그 시대에 차인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아암 혜장(1772-1811),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초의 선사(1786-1866)가 바로 그들이다. 이 외에도 명사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초의는 『동다송』과 『다신전』이라는 불멸의 차 서적을 세상에 내 놓았으니, 이는 후래 차인들에겐 차와 더불어 성스러운 보물 중 하나이며, 큰 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차의 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특히 『동다송』은 정조의 부마인 해거도인 홍현주(1793-1865)의 제다에 대한 물음이 계기가 되어 저술되었다. 그러한 다성 초의로부터 차에 대해 오롯하게 전수 받은 이가 있으니, 바로 범해 각안스님(1820-1896)과 응송 박영희(1892-1990) 스님이다. 이 분들이 바로 다름 아닌 완도인 들이다.

범해 각안스님은 대흥사 제13대 강사로서 선교에 회통한 분이다. 조선 마지막 대 강백으로 그 문하에서 수많은 강사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초의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다맥을 이었으며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차생활을 하였다. 조선에서 일제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차문화를 계승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으며, 다가・다약설・다구명과 34수의 차시는 선사의 차생활을 명확하게 관조해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들이다. 그리고 당시에 이름난 전국의 명차들을 소개하고, 그 차의 특성까지 열거한 점은 해박한 차지식과 차생활의 체험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생활과 차 정신은 그의 제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 또한 모두 시인이자 선사들로, 만나면 차 마시고 시 짓고 선정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약간의 시차는 있으나 해남 대흥사 주지로서 초의다법을 이어온 응송스님은 완도읍 태생이며, 16세의 나이에 기미년 3․1운동에 가담했다. 또한 만해 스님이 조직한 만당 요원으로 독립 운동을 했으며, 항일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77년 정부로부터 애국지사 애족훈장을 받았다.

그런 그의 다법은 일탕법이라고 한다. 즉 펄펄 끓인 물에 차 한 옹큼 넣은 후에 한 사발씩 덜어 마셨던 음다법이고, 지금도 뜨거운 열탕으로 쓰고 떫게 하여 마신다 한다. 차는 약용으로 마시기 시작하였으므로 그렇게 마시면 보다 약성이 뛰어나게 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기호음료로 상음하기에는 난감할 수 있다. 기호음료는 일반적으로 마시기에 편하고 맛이 있어 누구나 마실만한 맛과 향이어야 한다.

다른 기호음료와의 경쟁력을 갖지 못하는 차라면 시대문화적 보편성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역시 과거의 유습은 그러했으나, 오늘날에 있어 만드는 방법이나 마시는 방법과 기준이 시대 흐름에 따라 다르게 바뀐다하여 이를 두고 잘못되었다거나 또한 탓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차가 갖는 또다른 시대적 변화와 특성이 있기 때문이며,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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