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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재판 피고, 광주 다음으로 완도 많아

[완도군청년회-완도신문 공동 청년프로젝트] 완도 근현대사 한축 담당 청년회 역사 찾기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3.15 13:29
  • 수정 2019.03.1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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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본 특별기획은 완도군 청년회 창립 40주년을 맞아 완도 근·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해왔던 청년회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미래적 가치를 함양하기 위한 완도군청년회-완도신문 공동 청년프로젝트이다.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사회주의 각파의 움직임은 항일운동 노선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20년 고려공산당이, 1921년 서울청년회가, 1922년 무산자청년회가, 1923년 단일한 조직으로서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의 도 단위 계통조직으로 전남청년연합이 있었고 군 단위 조직으로 완도청년동맹이 있었다.

1923년 3월 24일부터 31일 사이에 서울청년회 주도로 개회되었던 전조선청년당대회에는 전국 94개 단체 150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완도에서는 소안의 배달청년회 소속인 강사원, 신동희, 신우승이 참가하였고 금일에서는 금일청년회 소속의 임홍기가, 완도공제회에서는 이광우, 정인주가 각각 참가하였다. 또 강사원은 이 조직의 기관지 ‘청년당’창간 발기인으로도 참가하였다.

1923년 4월 20일 완도에서는 완도청년연합회와 완도무산청년회가 동시에 조직되었다. 완도청년연합회는 신만희가 중심이었고 완도무산청년회는 김병규가 중심이었다. 그런데 같은 날 두 단체가 따로 조직되었던 것은 분열이 아니라 역할의 분담이었다. 신만희나 김병규는 청년 노동운동에서 항상 송내호의 지도노선에 따르고 있었으며, 그 후 활동과정에서 행동을 같이하고 있다. 이 두 단체는 열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가령 1925년 2월에 개최한 완도무산청년회 임시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해방에 필요한 의식을 갖기 위하여 강연회, 독서회, 토론회를 실시한다.
2. 타협적 민족운동을 박멸하자.
3. 계급적 자각으로 해방운동의 제일선에 설 역군을 양성키로 한다.

이러한 결의는 소안노농대성회 사건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었음에도 그전보다 더욱 강경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이 두 단체는 1927년 완도청년동맹(위원장 신광희)으로 통합된다.
1927년 9월 10일에는 완도청년동맹 주최의 강연회를 금지하고 위원장 신광희를 검속하였으며, 9월 12일에는 신간회 주최 강연회를 금지하였다. 이에 신간회 군지부 정무간사 정학균이 서장을 상대로 전말을 따진 일이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소안의 송내호, 정남국,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사원, 백태윤 등이 완도의 나봉균, 최사열 등과 협의하여 3월 15일 완도읍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일경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4월초에는 완도공립보통학교에서, 이듬해 1월에는 고금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신지면에서도 임재갑, 임재경, 김재교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로 송내호 외 여러 사람이 투옥되었고 송기호는 광주에서 피검되어 징역 1년형을 받았으며, 최사열은 서울에서 투옥되었다.

광주학생운동과 완도 청년들의 역할은 2000년 발간된 ‘완도군항일운동사’에 정병호 당시 편찬위원장이 ‘완도군 항일운동’이란 글에서 잘 요약정리해 놓았다.

1929년 당시 조선의 국민감정을 표출했던 광주학생운동은 항일운동사에 있어 기념비적 사건이다.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 재판의 피고는 85명으로 광주, 나주, 영암, 담양, 화순, 순천, 장성, 보성, 영광 등지의 전남 출신과 경북 상주, 충북 옥천, 제주 등지의 사람들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중 완도 출신은 8명으로 광주 출신 12명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참가 숫자의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니지만 활동 역시 뛰어났다. 장석천, 문승수, 황상남, 정남균, 유치오, 박노홍, 정석규, 김홍남, 김향남 모두 당시 20대 완도 청년들로 광주학생운동 시위를 주도하였다.

광주학생운동 사건 관련자 85명 중 완도 출신들의 인적사항과 위반법령 및 형량은 다음과 같다.

장석천(29세) : 신지면 송곡리, 농업,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 징역 1년 6월
문승수(25세) : 군외면 대야리 사립학교 교원,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1년
정남균(27세) : 고금면(현 약산면) 장용리, 면화상,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1년
유치오(24세) : 고금면(현 약산면) 관산리, 오사카영어학교 선생,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1년
정석규(20세) : 소안면 비자리, 광주고보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 1년
김홍남(21세) : 청산면 당낙리, 광주고보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 1년
박노홍(24세) : 고금면 청용리, 광주사범학교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 1년
황상남(21세) : 군외면 신학리, 광주사범학교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 1년
김향남(24세) : 청산면 여서리, 학생, 독서회 활동, 징역 8월

이들은 성진회·독서회 등의 비밀결사에 참여하였으며, 11월 3일 당일에는 광주고보 학생 300명과 사범학교 학생 및 농업학교 학생 수십 명의 지원을 얻어 광주중학생(일본인 학생)을 공격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특히 장석천은 그 활동이 대단했다. 동경상대를 중퇴하고 조선일보 광주지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 겸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으로서 광주학생사건을 지도하였다. 1927년 9월23일에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 강석봉·김재명·강해석 등과 피검된 바 있으며, 1930년 9월초에는 신간회와 제휴, 서울에 들어가 휘문고보·보성고보·경신고보·배재고보·제2고보 등의 학생대표들과 회합하고 제2차 학생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일로 서울에서만 1,000여명이 투옥되고 500여명이 처분받은 바 있다. 조선일보는 이 사실을 1930년 9월 13일 호외로 크게 보도하고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장석천은 1932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징역형을 받았다.

<다음 편에서는 '해방 전후 완도청년단체 활동'을 주제로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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