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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속 완도 3.15만세운동 “예수교·천도교인 중심”

[언단의 장] 소안 3.15만세운동, 92년 군지 기록 외 사료에선 발견되지 않아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3.15 06:22
  • 수정 2019.03.15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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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만세운동(또는 3·1 혁명)하면 우리가 보통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과 ‘유관순’을 떠올리는 이유는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계기로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인 만세운동으로 사실상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완도는 기미년 4월 1일 전개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보다 보름 더 빨랐던 3월 15일 완도읍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완도 만세운동은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완도 만세운동의 경우 국사편찬위원회가 1988년 편찬한 한민족독립운동사 3 <3·1운동>에 “완도군은 3월 15일 예수교·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완도면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한 것을 시발로 고금도에서는 이듬해 1월에 고종황제의 1주기를 기회로 청소년들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그 중에도 고금면 도남리의 보통학교 학생 정학균을 중심으로 일어난 1월 22일의 만세시위가 대표적인 것이다. 완도군에서의 만세운동으로 송내호, 정학균, 이현열 등이 체포되어 징역 또는 태형을 당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또한 손형부 전 전주교육대 교수가 쓴 ‘식민지시대 송내호·송기호 형제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논문에 ‘완도·광주 3·1 운동의 주도와 태을교 활동’이라는 소제목으로 부분에서 “송내호는 3·1운동 때 고향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소안면의 정남국,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정태(일명 강사원), 백태윤, 완도읍의 나봉균, 최사열 등과 협의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천도교·기독교계 인물들과 연합하여 3월 15일 완도에서 수백명이 모여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동생 송기호는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 3·1 운동을 적극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그의 재판 판결문에 의하면, 광주 3·1 운동은 서울에 있던 김복현(나주)이 선언서 등의 전남지방 배포를 부탁받아 3월 6일 광주에 와서 광주의 김강(양림동)과 거사를 모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농업학교, 숭일학교, 수피아학교 학생들과 연락하여 3월 10일 시내에서 시위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송기호는 농업학교 기숙사에 거주하였는데, 거사를 연락받고 3월 8일 기숙사에 있던 김정수(광주 평동)·정병소(광주 대촌)·황오봉(완도 장사리) 등 농업학교 생도들과 같이 숭일학교를 찾아가 시위운동을 발기하고, 농업학교와 숭일학교 간에 연락활동을 담당하였다.

시위 당일 그는 두 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하고 독립을 축하하는 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이 재판기록은 〈광주일보〉 (1984. 3. 2∼4)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항소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대로 1년 형이 확정되어 대구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여야 했다“라고 나와 있어 최초로 소안도와 관련한 항일운동 논문을 쓴 이균영 동덕여대 교수가 ‘사회와 사상’ 89년 9월호에 게재한 ‘해방의 땅 소안도’에서 이를 바탕으로 광주로부터 언제 어떠한 경로로 완도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그 전달경로가 천도교의 지방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과 송기호가 광주와 완도의 만세운동을 잇는 구실을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의 근거가 됐다.

이 밖에 군외면과 신지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이기홍 선생의 유고집에 구술 기록은 있으나 서류나 공문서 등으로 남아 있는 사료는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아쉬운 점은 최근 12년 동안 3·15 만세재현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소안도 3월15일 만세운동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소안의 경우 1992년에 발행된 완도군지에 나와 있는 기록 말고는 신빙성 있는 사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92년 완도군지에는 소안에서 수천명이 각부락을 돌면서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했다는 내용이 있고, 신지면의 경우 “임재진, 김재교, 임재갑이 태극기를 크게 만들어 상산과 독계령에 꽃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다시 임재진은 독립선언서를 써서 거리에 붙이고 태극기를 만들어 주재소 앞 상산에 꽂아둠. 그 당시에는 오래도록 누구의 소행인지를 알길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때에도 아는 사람이 없더니 완도독립운동사를 말하는 임재갑의 견문담에 의하여 밝혀졌다”고 기록돼 있다.  

완도군항일운동사 논문 가운데 박찬승 교수의 ‘일체하 완도(체도)의 항일민족운동’ 논문에는 완도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이외에도 소안도 등지에서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다.

미수로 그쳤지만 완도보통학교 만세운동 시도도 연구논저인 '신편한국사'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에 “완도에서는 7일 읍내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운동을 벌여 50명이 구금되었다.”라고 적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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