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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육의 도입과 완도항일운동

[특별 기고] 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15 05:51
  • 수정 2019.03.1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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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완도의 신교육은 1905년 대한제국시절 완도 제7대 군수 김상섭이 부임하여 서울에서 초기 시작되고 있는 신교육을 “완도사립육영학교”라고 간판을 걸고 교육을 시작한다. 김상섭은 보길도 사람이다. 서울에서 신교육을 알았으며 부임과 동시 완도에 신교육의 장을 만들었다. 초기 신교육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재력으로 사립육영학교을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제정의 부족으로 활발한 교육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07년 새로 부임한 제8대 군수 김긍조가 자신이 교장이 돼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1907년 6월2일 학급을 가리는 진급시험을 치르게 된다. 3학년 우등에 황영철 이사열(고금) 2학년 우등에 송내호(소안) 김대동, 1학년 우등에 김홍추, 김춘수, 김재교 등이었다.
2년 후 1909년 제9대 군수 송원섭이 부임하여 스스로 교장이 되고, 침천 김광선이 교감이 되어 학생을 모집하는 과정에 논과 밭들에 일하고 있는 장정을 찾아다니며 “부자가 되고 싶으면 공부를 해라” 설득하고 설득하였지만 학부모들은 냉담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설득의 효과가 있어 200여명의 학생이 확보되었다. 당시 육영학교 3년 과정이었다.

육영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는 사업에 진출한 사람과 육영사업에 진출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업에 진출한 사람은 고금도 김상석이다. 김상석은 15세 고금도에서 완도읍으로 나와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에 소사(잡일꾼)으로 근무하면서 야학으로 사립육영학교 3년을 수료했다. 그리고 잡화상을 열어 장사를 시작하면서 완도에서 생산되는 해초를 일본으로 수출했다. 큰돈을 벌었다. 20세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큰 사업가가 되었으며 삼성 이병철회장이 부러워했던 인물이다.

육영사업에 진출한 사람은 학교를 열어 교육을 시키고 교육의 목적을 항일에 두었다. 고금도 청용리 이사열은 완도육영학교 1회 졸업생이다. 3년 졸업을 마치고 한성외국어 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과정 3학년이 되던 해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2년에는 고금도에 개량서당을 열어 김영현을 교사로 학당을 개설하였고 1916년에는 사립고금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하여 교육에 힘썼다. 그 후 1920년 고금도 3.1운동을 지휘했던 아들 이기홍과 사촌 이현열을 설득하여 3.1독립만세운동을 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아들 이기홍은 광주고보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퇴학을 당하고 전남운동협의회 주요인물로 활약하였다. 부자가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던 인물이다.

송내호는 소안면 바자리 출신이다. 완도육영학교 2회 졸업생이다. 3년 졸업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사립중앙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을 하고 소안으로 내려와 사립중화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인근 노화면에서도 사립영흥학원을 설립하고 학생을 지도하였다. 1920년 서울로 올라가 대한독립단 전라도 지단장을 맏아 항거하면서 검거되어 징역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그 후 귀향하여 1922년 수의위친계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계하였다. 신간회 창설시에는 중앙본부의 상임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소안배달청년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1928년 12월 20일 세상을 떠난다.
완도의 대표적 민족 민중 운동가이다.

항일운동의 초기 활동했던 인물은 고금도 이사열과  다음으로 소안도 송내호이다.
완도육영학교 1-2회 졸업생으로 신교육을 받고 민족의식을 깨우쳐 항일의 불꽃을 피우는 결과를 가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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