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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팔경, 느림의 행복 '슬로길'로 다시 태어나다[청산 특집] 2. 청산면에서 가볼만한 '명소'
박주성 기자 | 승인 2019.01.05 08:53
청산도민에 대한 착취와 폐단이 날로 심해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조정에 수차례 상소를 올린 세 선비를 기린 공덕비가 있는 '삼현비각'

당리 삼현비각(三賢碑閣), 세금 폐단에 죽음 무릅 쓴 상소 올린 세 선비
궁방은 조선시대 왕실의 일부였던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의 통칭하는데, 궁실은 왕과 선왕의 가족 집안을 뜻하며 궁가는 역대 여러 왕에서 분가한 왕자·공주들의 종가를 의미한다. 조선전기 후궁·대군·공주·옹주 등의 존칭에 지나지 않던 궁방은 직전법 폐지로 왕족에 대한 생계대책이 현안이 됨에 따라 17세기 이후에는 재정운영의 주체로서 역할이 두드러진다.
영조 3년(1727년)때 숙종의 여섯째 아들 연령군의 사저인 연령군방에 청산도를 하사하였는데, 동시에 수군진인 신지진에도 영속되어 군선 건조를 위해 완도에서 목재를 운반하는 등 민역이 심해졌다. 17세기 초 700호에 달하던 청산도의 민호가 정조 21년(1797년)에는 200호 밖에 남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만 하다.
그런데도 관에서는 700호에 대한 민역을 부과하면서 부자들에게는 뇌물을 받고 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빈자들에게는 역을 중첩시키는 등 착취와 폐단이 날로 심했다. 그러자 1797년 선비 김몽희와 참봉 김만연·최창세가 죽음을 무릅쓰고 조정에 수차례 상소했다. 결국 정조가 민역 12조를 개혁하여 폐단이 없어지고 도민이 안정을 찾았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당리 서문 안에 공덕비를 건립했으나 세월이 흘러 훼손되어 1916년 현재의 위치인 당리 마을 입구 서편제 촬영지 맞은 편에 다시 세웠다. 2005년엔 완도군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됐다.
삼현비각이란 이름에서 나타나듯 어진 선비 세분을 모신 곳인데, 비각이란 비석을 보호 또는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을 말하는데, 건물이 아니라 약간 낮은 시멘트 담을 주변에 둘러놓은 정도라 군 지정 향토유적임에도 관리가 아쉬운 대목이다. 
 

평생 선비로 청산도에 학문의 씨앗을 뿌린 조선말 문신 김류 선생 추모 사당 '숭모사'

부흥리 숭모사(崇慕祠), 조선 말 문신 김류 선생 추모 서당
‘청산 가서 글 자랑 마라’라는 말이 전해지는 문향의 고장으로서 청산도 그 중심에 숭모사가 있다. 숭모사는 조선말기 문신인 김류(1809~1884) 선생의 학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여수시 거문도 유촌리 출신의 선비인 김류 선생은 유년시절 조선 6대 성리학자 중 한 분인  전남 장성의 노사 기정진 선생에게 학문을 수학한 후 고향인 거문도로 돌아와 만해 김양록과 함께 낙양재를 지어 지역의 영재교육에 힘썼고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이곳 청산도와 여서도에도 서당을 열어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절해고도인 청산도, 거문도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평생동안 선비다운 기품을 보여주었으며 숨을 거두는 마지막 날까지도 청계제에서 제자들에게 강론을 하다가 1884년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타계하자 거문도 제자들은 낙영재에서 매년 9월9일 제를 지내다가 해방 후 고도에 새로 귤은당을 지어 그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청산도에서는 1885년 제자인 김낙인 외 43명이 뜻을 모아 지금의 위치인 청산도 부흥리 터에 숭모사를 세우고 매년 음력 3월3일에 제를 지내고 있다.
 

피내리 고랑 슬픈 전설이 내려오는, 아직 손때 묻지 않은 청산도의 비경 '장기미 해변'엤

장기미 해변, 피내리 고랑  슬픈 전설이 내려오는 아직 손때 묻지 않은 청산도의 비경
느림의 여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슬로우시티 운동의 철학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유명해진 슬로우시티 청산도에서 이미 유명해진 명소보다는 장기미 해변을 청산도의 비경으로 추천한다.
사실 이 해변은 얼마 전만 하더라도 청산도에 사는 사람만이 아는 해변이었던 데다가 찾아가기도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슬로길 5코스가 개통되면서 사람 손길이 닿게 됐다. 때 묻지 않았기에 더욱 바다빛이 고운 해변이다. 장기미에서 기미는 순우리말로 바닷가를 뜻한다.
장기미는 멍때리기에도 좋은 곳이다. 상도라는 무인도가 장기미 해변 앞에 딱 버티고 있는데 “저 섬이 왜 저기 있지?” “뭘 의미할까?” 되뇌이다보면 순간적으로 멍때리는 정신상태로 접어든다.
또 해안 절벽에 소금처럼 부서지는 파도와 기암괴석, 탁 트인 남쪽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장기미 해변은 주상절리 같은 좌우 절벽의 바위와 파식대(파도에 의해 깎여서 평평해진 바위)가 발달해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불과 수십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계곡과 바다가 공존하는 지형이다.
이곳은 아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청산도는 왜구의 침탈이 자주 있었던 곳인데, 1555년(명종10년) 을묘왜변 이후 왜구는 수차례 서남해안을 침범하면서 청산도에 정박하여 다음 기항지를 물색했다고 한다. 왜구가 청산도를 육지로 상륙하는 경유지로 이용한 것이다.
바로 이 왜구들의 침입경로가 청계리 뒤편인 이곳 장기미에 선박을 정박하고 산을 넘어 마을을 침탈했다. 장기미에서 청계리로 넘어올 수 있는 곳은 보적산 아래 계곡을 타고 오는 외길인데 주민들은 이웃 주민들과 연계해 장기미에서 갯돌을 주어 보적산 위 중턱 계곡을 끼고 있는 곳에 모아두었다가 왜군들이 계곡으로 침범해 올 때 돌로 쳐부쉈다. 왜구들은 계곡에서 대다수 사살됐으며 그 핏물이 냇가를 이뤄, ‘붉은 핏물이 흐르는 냇가’라고 하여 이곳 장기미 해변으로 내려오는 계곡을 ‘피내리 고랑’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조선말 왜구 침입 대비 시설로 축성된 '청산진성'

청산진성(靑山鎭城), 조선말 왜구 침입 대비 시설로 축성
청산도가 지닌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왜구에 적극 대비하기 위한 군사시설로 진이 설치되었으며 청산진성 축성은 1871년(고종8년) 청산진 제3대 첨사인 박정희가 쌓았고 성의 둘레는 약 1.100m이고, 성문은 동·서·남 3개의 문이 있었다.
청산도는 해로의 요충지로서 가장 먼저 왜구가 당도하는 곳이며 실제로 이를 입증하는 왜구의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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