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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역사(1)마광남(노동부 한선기능전수자 01-5호 )
완도신문 | 승인 2018.11.23 11:42

이제 김장철이다. 우리는 김장을 매년 큰 행사로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먹고 사는 김치는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 김치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약 3천 년 전의 중국문헌 '시경'이며, 오이를 이용한 채소절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저'라는 글자가 나오며 김치에 관한 첫 기록은 2600 ~ 3000년 전에 쓰여 진 중국 최초의 시집 시경에 "밭두둑에 외가 열렸다.

외를 깎아서 저를 담자는 구절이 있는데 "저"가 염채, 즉 김치의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씨춘추에는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었다. 는 기록이 있으며 한말경의 사전인 석명에도 "저"의 설명이 나온다.
석명에는 김치에 대해 "채소를 소금에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의 짓무름과 부패를 막는다."라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채소를 즐겨 먹었고 소금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과 역사적으로 젓갈, 장 등의 발효식품이 만들어진 시기 등을 고려할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김치 류가 제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김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인은 채소를 먹고, 소금을 멀리서 날라다 이용하였으며, 초목이 중국과 비슷하여 장양(술 빚기, 장, 젓갈 담기)에 능하다'고 하여 이 시기에 이미 저장 발효식품이 생활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도 고구려인들이 채소를 먹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고, 당서의 기록을 보면 '삼국의 식품류는 중국과 같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중국의 '제민요술'에 열거된 오이, 박, 토란, 아욱, 무, 마늘, 파, 부추, 갓, 배추, 생강, 가지 등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유적 중에서도 김치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들이 있는데, AD 600년경 창건된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높이 1m 이상의 대형 토기들이 그것이다. 승려들의 거처에서 발견된 이들 토기들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어서 의도적으로 땅속에 묻어두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삼국시대 김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또 AD 720년 신라 성덕왕 19년에 세워진 법주사 경내의 큰 돌로 만든 독은 김칫독으로 사용됐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장의 기원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치를 뜻하는 '저'라는 글자는 '고려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고려사 제60권 예지 제14권 새벽관제 제사를 올릴 때의 진설표에 저 4종(부추저, 순무저, 미나리저, 죽순저)이 나온다.
고려 말 이달충의 '산촌잡영'이란 시에는 '여귀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 절임을 하였다'는 구절이 있어 야생초를 이용하여 제철 김치의 맛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목은집'에도 '침채', '산개염채', '장과'(된장에 담근 오이장아찌) 등의 표현이 나온다. 한편 고려사 예지에는 `근저(미나리 김치)', 구저(부추김치), 약구(삶은 부추)ㆍ생구(생 부추)로만 반찬을 하므로 란 구절이 있으며, 청저(나박김치)', `순저(죽순김치)' 등의 김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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