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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휘파람 불 제

[완도 시론] 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11.16 10:26
  • 수정 2018.12.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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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 그게 어디 ‘인간’의 목숨뿐만이랴. 생명을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께는 좀 죄송한 말이지만, 모든 숨탄것들의 숨은 소중하다. 그것은 그것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언젠가는 그 숨이 끊어져야 할 운명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생명이 무한성이라면 그게 그리 귀히 여겨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그 이상은 못될 것이다.

한동네 사는 동무가 제 몸에 불을 덩겄다. 머리에서 자꾸 불을 붙이라는 환청이 들려와 입고 있는 옷에 라이터를 댔단다. 오래전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두어 달 약을 안 먹어 증세가 심해진 모양이다. 스스로 화상을 내고서도 이틀인가를 돌아다니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병원에 실려 갔단다. 화상이 심하지는 않아 간단한 치료를 받고는 정신과가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젊은 시절 거칠게 떠돌아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고 있다. 가족들도 돌볼 상황이 안됐다. 동네사람들은 죽는 게 낫다고들 한다. 하고 다니는 꼴이나 술에 취해 비틀대는 모습이 혐오스럽고 무섭단다. 자신들에게 어떤 해코지도 한 적 없는데 그렇다고 한다. 까닭은 그 친구에게 있겠지만 세상에서 외면당한 삶이다.

요새 한 작가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 ‘문학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버린 사람이다. 그리할 수밖에 없는 고뇌가 있었겠지만 남겨진 가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었으리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의 죽음을 애드러워했다. 아까운 사람이었다며 혀를 끌끌 찼다. 인간적으로도 그랬고 문학적으로 그랬다. 그의 친지들은 그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걸 꺼려했다. 상처가 그만큼 컸을 것이고, 명예로운 죽음이지 못했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측면에서는 똑같지만, 그가 산 삶의 모양에 따라 죽음의 모습도 달라진다. 대통령의 죽음과 촌부의 죽음이, 영부인의 죽음과 촌 아낙의 죽음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송강’은 그것을,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메고 가나’와,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예나’로 표현했다. 삶의 형태가 죽음의 형식을 만드는 셈이다.

그가 성취한 업적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이 돼 있으니까 대통령으로 대하는 것이고, 거렁뱅이가 돼 있으니까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죽음 뒤에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자체의 판단으로까지 이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그가 이룬 것 하나 없을지라도, 그가 사람들 눈에 정말로 하찮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그가 숨을 타고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를 그렇게 보는 그 역시 그렇게 존중받아야 하듯이 말이다.

‘장진주사’의 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가면 / 누른 해, 흰 달, 가랑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 뉘 한 잔 먹자할꼬 /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휘파람 불 제 / 뉘우친들 무엇하리.’

죽은 후면 모두가 똑같아진다는, 너무나 명확해서 오히려 진부한 사실을 깨닫기 전에, 사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운명 안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보이는 그것들 때문에 너를 낮보고, 그를 웃본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 아닌가. ‘소소리바람 불 제’ 한 잔 먹을 수도, ‘잔나비휘파람 불 제’ 뉘우칠 수도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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