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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새가 처음 본 존재를 사랑하듯

[에세이-고향생각] 배민서 / 완도출신. 미국 거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10.26 09:17
  • 수정 2018.10.28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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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완도에 가던 날, 뉴스는 태풍 콩레이의 북상소식으로 분주했다.
"나는 상왕봉도 올라가고 싶은디야~" "그라믄 내일 밖에 없다야~ 비 오기 전에 일찌그니 갔다가 오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간밤의 잠은 설쳤지만 가슴은 잔잔하게 설레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에 나는 교회 중고등부에서 상왕봉을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네 시간 정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겨우 올라갔었던 기억이 또렷한데 친구는 한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산 중턱까지는 길이 잘 닦여져 차로 올라갔고, 그곳에 잘 지어진 휴양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르막 길에서 친구랑 기념촬영을 하기위해 큼지막하고 평평한 돌 하나를 주워 나무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셀프카메라 기능 10초를 셋팅하고 친구 곁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나중에 여기에 다시 오게되면 저 돌이 그대로 있는지 봐 줄래?" 

지금도 나는 철부지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쉽게 잊혀질 추억 한 자락까지 기억하고 또 기억해, 어느 날엔가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탄생 시키고픈..., 나는 그렇게 늘 한 편의 시처럼 살고 싶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가난하고 황량했던 나의 사춘기 시절을 절망하지 않고 풍요롭게 우정을 나누며 꿈을 키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산행은 마치 우리의 인생길처럼 가파르기도 했고 돌틈을 아슬아슬 건너게도 했다가 아름다운 장관들을 한 눈에 바라보게도 만들었다.

군데군데 나무뿌리와 자갈들이 얽혀있는 산길을 걷다가 숨이 가빠올 무렵에 우리는 바위에 걸터앉아 깍아 온 배를 한 입씩 깨물었다. 아삭하게 씹히며 입 안 가득 고여드는 맛은 더 없이 달고 시원했다. 정상에 가까워지니 나무들은 키가 작았고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잎새들의 가는 떨림 사이로 푸른 하늘이 바라다 보였다.

어느덧 내 인생도 가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쁘게 앞만 보며 달려오는 동안 세월은 참 많이도 흘러가 버렸다. 아티스트를 꿈꾸던 십대 소녀가 노란모자를 쓰고 상기된 얼굴로 탄성을 지르며 좋아라 했었는데, 거의 사십 년이 가까와서야 두 번째로 상왕봉에 오른 것이다. 바라다 보이는 풍광은 여전히 거룩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구비구비 펼쳐진 섬들의 아리따운 자태를 쪽빛 바다와 하늘은 신비로운 빛으로 감싸안고 있는 듯 하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사랑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를 품어 사랑으로 낳아 주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산행하던 날 아침, 친구가 노릇하게 구워 준 딱 돔 한 마리에 밥 두 공기를 뚝딱 먹어 치운 후에 나는 알았다. 아닌척 하여도 나는 완도의 맛을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가족 여행길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반찬은 고동을 일일이 까서 파를 송송 썰어넣고 마늘을 다져 간장과 고춧가루 고소한 참기름과 깨로 버무린 고동무침이었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구수한 가을 전어구이 역시, 미국에서는 먹어보기 힘든 고향의 맛 임에 틀림이 없었다.

알에서 깨어난 새가 처음 바라 본 존재를 사랑하며 따르는 거 처럼, 나는 내 고향 완도를 지극히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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