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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명상(冥想)! (1)

[무릉다원, 은선동의 茶 文化 산책 -36] 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10.12 10:52
  • 수정 2018.10.2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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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차와 선(禪)과 명상의 관계는 차 뿐 아니라 선과 명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선이라 하면, 동양적인 불교적 수행법으로 매우 전문적이고 너무 어려워 전문 수행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용어로 널리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명상이다. 왠지 선보다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 사회적으로 보편화 되어 있는 개념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기도 하고, 선과 명상을 엄격하게 차이를 두어 구별하기도 하지만 동등하게 설명되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자의 다름 외에 내용적인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접근하고 풀어가는 방식에서 그 깊이를 다르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 본의에 다가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요히 생각하는 것으로 명상의 의미가 이해되고 보편화 되어 있다. 맞다. 그런데 그렇게만으로는 그 깊이와 전모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종종 어떤 특정 단어를 정의할 때 대충 이해하기 쉬운 일반적 언어로 이야기 하는데 그치곤 한다. 즉 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는 본의를 생각하지 않고 대략 공감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명상하면 첫째 조용한 곳이라야 하고, 둘째 정해진 특별한 방법을 이용하여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 하며, 셋째 종교인이나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고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명상법들도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고, 그 방법 또한 너무 전문적인 용어나 어려운 말과 표현으로 이루어져, 더욱더 접근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즉, 너무 어렵고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특별한 수행(?)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과연 그럴까? 명상이란? 즉 명상의 정의는 매우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요즘들어 한 마디로 ‘마음 챙김’이란 용어로 많이 회자된다. 그러나 이 용어도 매우 표면적 용어이다. 즉 챙기는 마음(주체)과 챙겨야 하는 마음(객체)이 있고, 그 마음들은 어떤 마음이며, 어떻게 챙기는 것을 챙긴다 하는 것인가? 하고 물으면 쉽지 않다.

그 마음들의 작용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작용되는가에 대해 면밀히 연마되어 매 순간 경계마다 ‘그 마음의 알아차리기’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 순간 경계마다 작용하고 있는 나의 마음에 대해 알아차릴려면, 알아차리고자 하는 그 마음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초롱초롱하고 생생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언제?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래서 항상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잃지 않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식견이나 지식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의 목적이다. 늘 이렇게 하고자 훈련하는 일련의 과정이 바로 명상인 것이다. 즉 우리의 삶 전체가 곧 명상의 연속인 것이며, 그 마음을 놓치고는 존재자의 본질적 삶을 살았다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삶의 모든 가치관들이 비롯되었다. 그 자리가 바로 우주적 자아와 존재적 자아가 만나는 궁극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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