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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대재(水陸大齋), 더 성대히 치러야

[특별 기고] 마광남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50호 조선장, 노동부 한선기능전승자 01-5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9.24 16:01
  • 수정 2018.09.2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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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남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50호 조선장

수륙대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 수륙재의 절차는 부처님의 위신공덕으로 악도에서 헤매는 중생을 건진다는 뜻이므로, 먼저 바다와 육지에서 돌아가신 고혼을 바닷가에 나가 청혼하는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음에 불보살을 모시는 시련의식과 부처님께 공양하는 불공, 모든 중생을 위하는 설법, 그리고 영혼들에게 베푸는 시식, 중생에게 베푸는 회향, 마지막 위패를 태워 영혼을 보내는 소전 의식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505)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신승의 계시에 따라 유주무주(떠도는 넋)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수륙의문을 짓고 재를 설한 것이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때는 국중수륙대재를 실행하였고, 조선의 태조도 진관사(津寬寺)와 석왕사에서 시행하였다. 수륙재는 조선조 중엽까지 국가의례로서 전승되던 중 유생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 오늘날에는 민중적인 의례로 전환되어 사찰 마당이나 강 또는 바다에서 시행하고 있다. 수륙재의 수륙은 여러 신선이 흐르는 물에서 음식을 취하고, 귀신이 깨끗한 땅에서 음식을 취한다는 뜻에서 따온 말이므로 청정한 사찰 또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행하여도 무방하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행해졌는데, 광종 21년 (970)길양사에서 수륙도량을 연 것이 시초이다. 이후 선종 때 송나라에서 최사겸이 수륙재의 의식을 적은 수륙의문을 가져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에 수륙당을 새우기까지 할 정도로 성대하게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는 태조가 진관사를 국행수륙재를 여는 사찰로 지정하는 등 성대하게 행해졌다.

천년고찰 관음기도 도량인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무위사는 617년 원효국사가 창건하고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세종12년(1430) 극락보전을 짓고  머물면서 수륙대재를 지내며 나라의 안녕을 빌었던 곳이기도 하다.

수륙대재는 그 당시에 왕실이나 궁궐에서 지냈던 행사다. 이러한 수륙재는 격변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무하기 위해 생성된 불교의례이다. 여기에는 내생(來生)을 받지 못하고 떠도는 수많은 원혼을 집단적으로 해원시키며, 동시에 신도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다.

이러한 수륙대재를 고금도에 있는 수향사에서 9월 30일 수륙대재를 지낸다고 한다.
정유재란 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라서 그 의미가 한층 더한 것 같다.
우리 완도는 373년이나 지속되었던 가리포진이 있었고 그동안 이름 없이 죽어간 원혼들을 달래주는 것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고려사 세가 10권의 기록을 보면  보제사 수륙당에 화재가 났다는 제목의 내용은 보제사 수륙당에 화재가 났다. 이에 앞서 폐인 섭호부낭중 지태사국사 최사겸이 송에 가서 「수륙의문」을 구하여 와서 왕에게 수륙당을 짓기를 청하였는데,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화재가 났다.(1090, 1, 26(음), 1090, 2, 28(양) 보제사 수륙당에 화재가 난 사건으로 인하여 1092년 8월 18일(음) 최사겸을 선산도(청산도)로 유배 보냈다.

어쩜 수륙대재와 완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연결이 되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행사를 더 키우고 성대하게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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