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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유배문화의 복원과 계승

[완도 시론] 김남철 / 완도고등학교 역사교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9.08 19:56
  • 수정 2018.09.08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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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철 / 완도고 역사교사

지난 달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향토문화연구 심포지움에서 ‘호남의 유배문화와 그 활용 방안 모색’이라는 주제로 호남 유배인들의 남긴 문학작품과 사상을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유배문화의 중요성과 역사적 사실을 스토리텔링하여 보급하고 기념관을 조성하여 유배문화 콘덴츠를 개발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조선시대 유배형은 유배대상자가 사는 곳에서 유배를 보내는 거리가 멀수록 중형이었다. 가장 험한 곳은 한양에서 멀기도 하면서 살기가 힘든 남서해안 섬이나 함경·평안도 북쪽 변방이었다. 한양에서 거리가 멀고 산골과 섬이 많았던 전라도는 유배지로서는 가장 적당한 지역이었다. 조선 8도중 전라도로 가장 많은 이들이 유배를 떠났다.

지난해 호남지방문헌연구소가 출판한 <호남유배인 기초목록>에는 호남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이 모두 928명이었다. 조선시대에 유배자들이 가장 많이 보내졌던 장소로 등장하고 있는 전라도 지역은 단일 장소는 진도(70회)를 필두로 해 흑산도(68회), 해남(58회), 강진(38회), 추자도(31회), 영암(28회), 순천(27회), 흥양(26회), 고금도(26회), 광양(24회), 장흥(22회) 등이다. 그 중에서도 유배자 수로 보면 신안(160명), 진도(109명), 완도(98명)순이다. 세 지역을 합하면 367명으로 전체 유배자의 36%에 해당된다. 완도는 적지 않은 유배인들의 활동으로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완도는 유배의 섬이고 소외의 땅이었다. 조선은 명나라 법률에 근거하여 3천리 유배를 실시했는데 땅덩어리가 좁아 3천리 유배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고안한 것이 바다를 한 번 건너면 천리를 쳐주어 고금도는 2천리, 신지도는 3천리 유배로 가장 절해고도로 간주되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벼슬아치와 사대부가 고금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중에 추사체로 널리 이름을 떨친 완당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있다. 완당이 귀양살이하는 아버지 김노경을 찾아뵈려 고금도에 와 잠시 지내면서 한양의 아내에게 한글로 써 보낸 편지가 전한다. 그 편지 내용에 아버지 김노경의 고금도 귀양살이 모습과 완당 자신의 생활이 들어 있다. 순조 30년인 1830년 10월 2일 완당의 아버지 김노경은 당쟁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고금도에 위리안치 귀양살이로 권력의 중심에서 퇴출당한다. 이후 김노경은 3년여 세월동안 고금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또한 당쟁으로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김정희는 55세 되던 해인 1840년 제주도로 귀양길을 떠나게 된다. 김정희는 제주도. 북청을 포함 총 13년여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나 귀양살이 기간에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하는 등 학문적 연구 업적을 남겼다.

신지도 유배인물 가운데 기록상으로 처음 확인되는 인물은 목내선(1617~1704), 그리고 행적이나 기록이 드러나는 유배 인물로는 정호(1648~1736), 김성탁(1684~1747), 이광사(1705~1777), 윤행임(1762~1801), 이세보(1762~1801) 등이다.

정호는 송강 정철의 현손으로 '지도의 위리안에서'라는 오언절구 시를 남긴다. 신지도 유배인으로서 확인되는 첫 번째 시이다.

김성탁은 신지도에 있을 때 큰 아들 구사당 김낙행과 작은 아들 김제행에게 보낸 글과 시 2편이 문집인 <제산집>에 남아 있다.

이광사는 동국진체의 서예대가로서 명망이 있었으며, 서법 이론서인 <서결>을 신지도에서 지은 인물이다. 이광사의 글씨는 서남해안 일대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윤행임은 신유옥사로 인해 유배돼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자신의 거처를 불기헌이라 하면서 '불기암기'를 짓고 저술에 몰입한다. 윤행임의 저술은 같은 시기에 유사한 정국 동향으로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돼 저술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저술과 비교할만한 가치를 지닌다.

이세보는 안동김씨 세도 정치하에서 신지도로 유배된 인물로,  460여수의 시조를 지은 문학인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시조를 많이 지은 작가이다. 많은 부분이 신지도 유배기간 중에 지어졌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 외에도 정약용의 형 정약전, 종두법의 연구자 지석영도 신지도의 유배 생활을 했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를 떼어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섬이다. 윤선도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회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의 절경에 매료돼 머물렀다. 윤선도는 자신이 정착한 일대를 '부유동'이라 칭했고 아직도 그의 자취는 그대로 남아있다. 보길도에 도착해 윤선도의 자취를 따라 가다 보면 호남 3대 정원이라는 세연정을 만날 수 있다.

유배인들의 문화복원과 계승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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