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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

[완도 시론] 정병호 /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9.01 14:01
  • 수정 2018.09.0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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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어지간히 더워야지, 요즘 같은 폭염에는 피서 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더위를 식혀 줄 시원한 비 소식도 없다. 타들어가는 논밭을 바라보는 농민의 가슴도 함께 타들어간다. 양식어민들도 마찬가지다. 적조주의보에 이어 고수온주의보까지 발령될 정도로 수온이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풍이 아쉬울 정도로 상황이 어렵다.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 무더위로 인한 짜증에 더해 울화까지 생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재판거래를 시도했거나 실행했고, 법관 및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실이라면 그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 나치시절에도 법원이 나서서 재판거래, 사찰을 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사법부 독립의 방패 뒤에 숨어 음험한 짓을 했다는 것에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법원은 피해를 입은 국민을 구제해 주라고 만든 것이다. 기본권 보장의 마지막 보루다. 그런데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이런 헌법적 요청을 저버린 것도 모자라, 국민을 탄압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사법부를 행정부가 탄압했다. 국민들은 민주화 투쟁을 통해 사법부에 독립을 주었다. 사법부는 그렇게 피의 대가로 얻은 독립을 국민의 기본권 수호에 쓰질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행정 권력에 팔아먹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상고권을 제약하는 상고법원을 대법원 아래 신설하고자 했다. 그렇게 하면 업무량을 대폭 줄이면서도 권세는 그대로 혹은 더 많이 누릴 수 있다는 발상을 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사법부는 검찰보다 더욱 혹독한 시련을 맞게 될 것이다. 사법부 최고 엘리트라는 분들이 이런 엄청난 짓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권력을 얻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 권력 가운데 행정부와 입법부는 선거로 권력을 얻는 반면, 법원은 고시 합격으로 권력을 얻는다. 국민들로서는 법관들의 권력을 직접 통제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법관에게는 아주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가 요구된다. 법관으로 임명될 때 선서하도록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본인은 법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법관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법관윤리강령에는 사법권의 독립을 수호할 의무, 품위유지의무, 공정 및 청렴의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할 의무, 정치적 중립의무, 경제적 행위의 제한의무 등이 있다. 법관의 의무와 책임이 엄중함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신임 법관의 선서를 받았을 대법원장이 사법유린 의혹의 중심에 섰으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직업윤리는 직업의식이 있어야 생긴다. 직업의식은 곧 소명의식이다. 대법원의 재판거래 시도는 일부 사법부 최고엘리트들의 소명의식 결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국가가 자신에게 사법권을 위임한 근본 취지를 망각한 탓이다. 국민들이 권력을 위임한 까닭은 개인 사이 그리고 국가와 개인 사이의 복잡다기한 분쟁에 대해 그들이 전문법률 지식을 가지고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뒤 갖은 소송에서 판관 역할을 하면서 자신이 최고이며 법 앞에 열외라는 오만에 빠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국민들이 검찰에 사법농단 사건을 공명정대하게 수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법농단 의혹의 중심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또 무더기로 기각됐다고 한다. 보통 발부율이 약 90%라고 하니, 또 다른 전관예우인 셈이다.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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