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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일행은 숨을 죽였고왠지 모를 설움에...

[장보고루트 3]#3 장보고가 19세기에 있었다면, 경술국치는 없었다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8.07.27 16:12
  • 수정 2018.07.2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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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안~와!"
사라진 녀석들이 눈에 들어오자 크게 소리치는 보은 쌤.
제대로 화가 난 듯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가올수록 화는 안도로 바뀌며 햇살에 해바라기가 열리 듯 평상심을 되찾은 얼굴이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혹시나 하며 걸었던 주성 쌤의 전화에 다행스럽게 통화가 된 녀석들.
수상 동물들을 구경하고 있었단다. 
천당과 지옥을 오간 듯한 은영 쌤의 표정. 잠깐이었지만 모두가 가슴을 쓸어 내려야만 했던 순간.
이를 지켜보던 지성스님은 "절벽 끝을 부여잡고 있는 것처럼 절박한 마음이었어요" "아이들을 보호하는 책임이 그런 것 같아요" "인간의 삶이란 실수와 실패 속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이고, 그 과정 하나하나를 걸어가는 길이 지금 이 순간의 나이고 온전한 나이다"면서 "아이들에겐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작은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라고 했다.


무박 2일에 걸쳐 펼쳐졌던 역사기행 첫날, 호텔에 여장을 풀자 모두가 피로감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둘째날은 청일전쟁을 상징하는 유공도 방문이었다.

19세기 한중일의 동북아시아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제국화의 기틀을 다진 후 대륙화를 꾀하기 위해 조선반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청나라는 영국과의 두차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으로 국력이 쇠퇴해 있었지만 아직 동북아의 패권을 주름 잡고 있다고 여겼다.

당시 조선은 개화파가 신식군대를 창설하자, 차별대우에 대한 반감으로 구식군대가 임오군란을 일으키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극도에 달해 있었고, 이러한 분열을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그 경쟁을 더욱 격화시켜 갔다.

이어진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조선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를 주시하던 일본 또한 조선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자진 출병함으로써, 무력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이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수립한 후 풍도 앞바다의 청국 군함을 선제 공격하면서 성환과 평양에서 청군을 대파하고, 요동반도와 심양, 산동반도 등지를 공격하여 전쟁 9개월 만에 청국을 굴복시킴으로써, 조선은 일제 36년 경술국치의 수모와 비운을 겪어야 했다.
 


영인 쌤은 "유공도는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침략에 무참하게 짓밟혔던 격전지로써 중국에선 섬전체를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어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자며 패전지를 관광화시켰다"고 말했다.

인솔 교사로 함께했던 김 주 전 의원은 "역사는 승리의 역사만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중국의 유공도처럼 패전의 역사를 후대인들에게 떳떳하게 가르칠 수 있는 역사가 진정한 역사가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후예들은 여객선을 타고 유공도를 찾았는데, 이때도 문제가 생겼다.
서른명이 넘은 일행이 한꺼번에 이동하다보니, 먹거리와 기념품에 먼저 손이 가는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인솔쌤 몇몇이 여객선의 정원 초과로 뒤늦게 오게됐지만, 곧 합류해 석도와 법화원으로 향했다.
 


적산 법화원. 이곳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해신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거액을 들여 세운 불교 사찰로 적산 인근에 위치한 신라방, 신라촌에 살던 동포들의 단합을 도모하고, 이국땅에서 신앙의 힘으로 의지력을 북돋는데 큰 힘이 되었다.

비가 오면 산에 있는 바위들이 붉은 색으로 변한다고 적산(赤山)이라는데, 입구는 넓게 포장되어 있고 멀리 적산명신의 어마어마한 조형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성 쌤은 "중국역사기행의 핵심은 신라방의 중심 역할을 한 적산법화원을 탐방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일정은 바로 이 적산법화원 방문의 부대행사일 뿐이다"고 말했다.
 


‘장보고세계해상무역제패기념비’라는 이름의 장보고기념탑에 이어 장보고전시관으로 이동하니 ‘무령종군(武寧從軍)’ 마당에는 장보고 대사의 전신상이, 안에는 좌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사의 전신상!

어마어마한 크기,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 당하여 일행은 숨이 막히는 듯 말을 잃었고, 목구멍 깊숙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오르면서 왠지 모를 설움이 복받쳐 오는 것 같았다.
"우리 함께 참배 할까요!"
모두가 묵념.
 


그리고 법화원 주지와의 만남.
만남은 화기애애했다. 지성스님은 법문을 청했고, 김 주 전의원은 지난 날 중국 법화원의 완도 방문을 회상했다.

본보에선 주지에게 "완도는 장보고뿐만 아니라, 고금도에 이충무공의 조선과 진린 도독의 명 수군 연합군이 있었고,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물자를 비축한 곳이다" "명의 진린 도독은 이충무공을 노야라고 부르며 높여 대접했고, 이충무공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의 출병이 바로 완도에서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당시 시진핑 주석과의 만남에서 양정상은 이러한 역사를 주지하면서 평화와 우호를 다짐했는데, 중국 법화원이 완도군과 우호 교류를 갖었으면 좋겠다"고.   

주성 쌤은 "한중수교 이전부터 완도는 중국과 장보고에 대한 교류가 있었는데, 2008~9년을 절정으로 이후 뜸해졌다"며 "글로벌시대, 장보고를 통해 한중일의 3국의 우호를 다지는 일에 중국 법화원이 노력해 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기념 촬영 후, 완도 수산물을 준비해 간 장보고아카데미에선 이를 법화원 주지에게 전했고, 법화원 주지는 활짝 웃으며 감사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 법화원엔 1994년 한중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취지하에 장보고기념탑이 세워졌는데 그곳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에 반가운 얼굴. 한국어를 쓰는 일행을 보고, 김성권 완도경찰서장의 친동생으로 위해시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태권 교사가 말을 건네왔고 일행은 잠시 정담을 나눴다.
 


법화원 문예대회와 함께 둘쨋날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 금당초교 강준우 학생은 "만약 장보고 같은 인물이 19세기에 있었다면,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면서 우리나라가 일제에 병합되는 일도 없었을텐데, 너무나 아쉽다" 고 밝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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