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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소문

[에세이-반짝반짞이는] 박소현 / 청산 모도보건진료소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6.01 10:16
  • 수정 2018.06.0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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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 청산 모도보건진료소장

지금 신규공직자 교육에 입소하기 전 독후감 숙제를 받은 나는 짧은 시간 완성해야 하는 압박감에 서점에 가서 동료가 권해준 백여 페이지 남짓 한 <어린왕자>를 집어 들고 나왔다.

어린왕자는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밀밭을 연상케 하는 금빛 곱슬머리와 하얀 이마, 그리고 한없이 작고 여린 몸과 해맑은 웃음소리를 지닌 어린아이의 모습이지만 나는 그의 순수성을 의심하기 보다는, 진정 그가 어린아이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흔히 아는 ‘피터팬’처럼 영원히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나보다 더 나이가 많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마지막 순간에 다시 독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별로 돌아갈 때 돌아가야 할 순간을 알며, 육체의 덧없음 또한 이미 알고 있고, 남겨진 이에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나는 어린아이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에 의해 깨닫게 되었을 때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게 바로 그가 어쩌면 어린아이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나마 나를 안심시키는 대목이다.

어른이 되면 내 생각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무책임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우가 왕자를 대하듯 그리고 왕자가 여우에게서 얻은 깨달음들을 잊지 않듯 그렇게 살았더라면 오늘의 외로움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들이고,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외면하고 산 결과일 뿐인 것을······ .

서른 후반을 넘어가면서 뒤늦게 사춘기를 맞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나 또한 외면하기도 하면서 셀 수도 없이 울고 또 울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먼저 다가가 포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많이 편찮으셔서 입원해 계시면서 유치원 이후로는 아빠 손도 거의 잡아본 기억이 없는 나에게 직장 때문에 짧은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우리 딸! 아빠 볼에 뽀뽀 한 번만 해다오.”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서였다.

아버지는 내 입술이 본인의 볼에 닿은 것만으로도 내가 아버지의 딸이자 아버지의 작은 버팀목으로 자란 것처럼 느껴지셨는지 “우리 딸이 뽀뽀 한 번 해주니 다 나은 것 같다. 조심히 가거라.” 하셨다. 훗날 혼자되신 어머니가 걱정되어 멀리 사는 조카들이 전화 와서 수화기너머로 “할머니 사랑해요!” 하면 엄마는 “나도 사랑한다. 내 새끼들 아니면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주겠냐, 고맙다.” 답하신다. 내 생각이 변한 건 그런 계기였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받으면 누구라도 힘이 솟는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친구든 직장동료든 상사이든 내가 정말 아무 거리낌 없이 좋아하고 존경한다면 나는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적인 차이일까 아니면 어른들이어서 일까? 아니면 그런 표현을 하는 내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일까? 나의 이런 거침없는 나만의 진정어린 표현들은 때로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난 곧 잘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지거나 소문이 나기도 했다.

내 의도와 다르게 몇 번 반복되는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자연스레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거리유지를 하는 것만이 내가 다치지 않는 길이라 생각하고 방어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지금도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고민한다. 내가 그 사람과 서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거쳐야 할지 아닐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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