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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것, 오는 것, 만드는 것

[완도 시론]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5.13 09:42
  • 수정 2018.05.1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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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지 않아도 너는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 이성부, ‘봄’에서 ­


그랬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봄은 온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우리는 겨울의 날들을 견딜 수 있었다. 누군가는 웃을지 몰라도, ‘봄’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은 어쩌면 피가 끓고 있던 우리들에게는 살아가는 의미의 전부였는지 모른다. 아니다. 그것만이 우리들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이유의 전부였다. 

민주화가 진전됐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세상에는 봄은 왔다고 느꼈었다. 봄의 세상은 이런 것이라고 믿었다. 봄은 이런 것이라며 봄의 숨결과 향기를 마음껏 향유하며 지냈다. 하지만 어느 때인가에, 세상이 다시 겨울로 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이 더 화창한 봄을 예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그 세월을 사는 것은 참으로 분노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봄이 왔다. 남의 들녘에도 북의 산골에도, 남의 산등성이에도 북의 산꼭지에도, 그래 기어이 봄은 오고 말았다. 봄을 저어하는 것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오고야말 봄은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이치고 세상의 모양새다.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다.

때는 꽃 피는 춘삼월, 봄이 무르익을 시절이다. 한데 올해의 봄은 표독스럽게만 느껴진다. 벚꽃이 피었는가 싶었는데 비바람이 꽃잎을 날려버렸다. 그러고는 겨울외투를 꺼내게 한 강풍이었다. 그 바람을 뚫고 그래도 유채는 피었다. 하지만 그 노란 꽃도 된바람에 날려 일주일을 못 가고 꽃대로 남았다. 그러고는 또 보일러를 높여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겨울 같은 봄의 새중간에서 나는 내 삶의 어디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꽃 피는 청춘이 가면 가을의 시절이 오고, 그러고는 앙상한 겨울이겠지. 그렇게 삶은 흘러가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들 사이로 내가 딛고 있는 현실과 내가 가야 할 날을 또 떠올려 보게 되었다. 나에게 봄의 날들이 있을까. 꽃이 피어 웃을 수 있는 시절이 다시 있을 수 있을까. 아니었다. 암담한 그림들만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때 바람이 나를 쓸어갔다. 나는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렇게 기대했던 삶이란 게 결국 이런 거였구나. 이렇게 한정없이 허덕이다 그리고 끝내는 저물어가는구나. 세상에 봄은 또 오겠지만 이제 나에게 봄이라는 건 없겠구나. 다시 더 옹크리며 터덜터덜 시멘트 블록이 깔린 폐교의 운동장을 걸었다.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으므로 눈은 시멘트 블록이 깔린 운동장을 더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새끼손톱 절반만밖에 안한 노란 꽃이었다. 너무나 앙증맞은 꽃이었다. 그 작은 것이 블록 사이에서 저만의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꽃아, 작은 꽃아, 그래도 너는 너의 봄을 만들고 있었구나. 시멘트 사이의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 그 속에서 너는 너의 노란 봄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랬구나. 작은 꽃아.

그제서야 나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문도 저편 어디쯤에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작은 꽃이 만든 노란 봄이 나에게도 느껴져 왔다.
 

정택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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