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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영애 보다 내사랑‘강영애’가 더 이삔 이유

[나의 반쪽] 이송현 독자(신지면장)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8.04.29 22:34
  • 수정 2018.04.29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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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홍보계장 출신인 면장님에게, 독자 투고 하나 부탁해도!”
“무, 무슨 내용으로?..."
“사모님과의 연애담 등등...”
속으로 화들짝 놀라면서도 겉으론 정중하게 말했다.“우리 부부에게는 이렇다할 연애담이 없어 쓸거리가 없는데...”
“그럼 다음주, 나의 반쪽란은 백지로 나가게 됩니다. 물론 독자들에겐 면장님이 고사했다고 알려야 겠지요!”

완도신문 편집국장의 집요하고도 막무가내식 협박성(?) 원고 청탁! 아, 정말이지! 빠져 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린 듯하다.
먼저 소중하고 귀한 지면을 차지하게 되어 독자분들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할 뿐이다.
그날 밤, 아내에게 이래저래 했다고 하니, 단번에 하는 말“뭐 쓸거나 있어요?” 하며 시큰둥한 눈치.
남들과 같이 알콩달콩 연애를 즐긴 시절도 없었고 딱히 감동을 줄만한 순애보거리도 없어 고민은 깊어갔지만 언론사와의 약속이니만큼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아내를 처음 보게 된 것은 손위 처남과 당시에 4-H활동을 하던 인연으로 미래 처갓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이른 아침 하얀 브라우스에 무릎까지 내려간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똑똑, 구두 소리를 내며 직장에 나가는 모습을 곁눈으로 보게 된 것이 처음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당시, 완도읍에 있는 조그만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난 부모님 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땐 휴대폰도 없던 때이고 집에 전화는 보통 안방에 놓여 있어 마음껏 통화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직장으로 전화를 직접 걸지 않으면 통화가 어렵던 때라 논밭에서 일하다가도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달려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곤 했었다.

신지대교가 놓이기 전이라 교통도 몹시 불편해 자주 만나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 번 쯤 완도읍에 있는 다방과 호프집(당시는 경양식집으로 부름)에서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별히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지 못하고 만남을 이어가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형편 때문에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채 시부모님 밑에서 시할머니까지 모시는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평범하지만 부끄럽지 않게 가정을 꾸려온 아내에게는 늘 미안하고 감사함 뿐이다.
신혼생활의 설레임도 잠시 시련이 닥쳤다.
아내가 임신 7개월쯤 되던 시기, 배가 너무 부풀어 올라 병원에 갔더니 양수과다증이라며 의사가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
한달 정도를 버티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결국 대형병원에 갔더니 쌍둥이 태아 중 하나는 이미 죽었고 하나는 생존이 어렵다는 진단.
나는 "아기고 뭐고 필요 없으니 산모를 살려주세요!"
의사에게 요청하여 결국 수술을 했다. 불가피한 상황! 하지만 한꺼번에 두 아이를 잃은 아내의 고통은 이루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두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가슴 아파하며 울던 아내가 너무 안쓰럽고 평생동안 미안한 마음 뿐이다.
그런 어려움을 겪는 도중에 나는 운좋게 공직에 입문할 수 있었고 초임으로 청산면에 근무하게 되었다.

청산면에서의 생활은 나와 아내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시기였다. 도청마을의 어느 집 문간방에서 살림을 시작으로 세 번의 이사를 옮겨다니며 6년 동안 생활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어엿하게 성장한 아들딸을 얻었고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맺을 수 있었지만 아내에게 미안해야 할 일의 연속이었다.
 


신지 본가에서는 일년이면 4번의 제사, 두 번의 명절을 비롯해 가족들 대소사까지 도맡아야 했다. 지금같이 연가나 대체 휴무 제도가 활성화 되었다면 아내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엔 제사를 모신다고 연가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완도-신지간 철부선만 타도 멀미가 심했는데 편도만 1시간 40분씩 걸리는 뱃길에 얼마나 고생했을까 짐작 해보면...

6년간의 청산도 생활을 접고 군청에서 잠시 근무하다 7급을 달고 다시 보길도 근무를 시작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만 4년을 주말부부 생활을 했다.
그땐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했는데 주말만 되면 왜 그다지도 폭풍주의보가 자주 내려 뱃길을 끊어 놓았는지?
정말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토요일에 못나가면 또 한주를 버텨야 했는데 홀로 애들 키우랴, 시댁 안부살피러 다닐라 고생이 좀 많았을까.

아내는 전업주부 생활에 부담을 느꼈는지 부부공무원 자녀를 돌보는 일을 하기도 했다.
아내가 돌봐준 애들이 언뜻 헤아려 보니 8명 정도였는데, 가장 먼저 돌본 애가 벌써 대학생이 되었고 두아이는 고3, 고1이 되어 가끔씩 인사하러 찾아오면 참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아내는 돌봐준 애들 생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이들 생일날이면 요넘들 미역국이나 먹었을까?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요즘도 들은 것 같다.

아내는 일주일마다 발행하는 지역신문 배달일을 3년간이나 하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운전이 위험해 운동삼아 따라나서 배달 일을 도운 적도 있다. 아파트에 신문을 꼽다가 아침 운동을 나가는 동료공직자들의 눈을 피해 황급히 자리를 뜨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렇게 부끄러운 추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군청에 근무하는 기간, 아내와 나는 2,500평의 논농사도 지었다. 몇 년전이다. 논에 나가 경운기로 농약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운전부주의로 아내가 추락사고를 당해 허리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 장기간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 땅바닥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나뒹구는 아내를 보고 어찌나 놀랬던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져 온다. 문병차 찾아온 아내 지인들이‘남편과는 언덕이나 벼랑이 있는 곳엔 함께 가지마라’고 했단다.
남편이 장가 한 번 더갈라고 뒤에서 밀어버릴지 모르니 조심하라 했단다.(하하)

아내가 병원 생활을 하던 기간이 아내의 빈자리를 가장 강하게 느낀 시기였다. 미안함을 더한 것은 아내와 함께 외국 여행을 한 번도 다녀오질 못했다.
난 직장생활 덕분에 몇 차례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아내는 중국여행 한번 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시동생네 가족이 집안 어른들을 모시는 여행길에 덤으로 끼어서 다녀왔다.

올해는 어떻게 해서라도 못가본 신혼여행을 생각하고 있지만 꿈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난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면 나중에 멋진 캠핑카 한 대 구입해서 공직생활을 마치는 날 국내일주를 시작하자고 말하곤 했다. 아내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캠핑카를 보면서 ‘내가 타고 떠날 캠핑카는 뼈대나 만들어 졌을까? 하고 푸념 섞인 압박(?)을 가해 온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로 약속을 꼭 지켜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아내는 1년 전 오른쪽 어깨 신경 수술을 받고 팔을 마음껏 쓰지 못한다. 가끔 신경이 둔해 그릇을 놓치기도 해 설거지 소리가 예전보다 더 시끄럽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그만큼 나에게는 아내가 소중하기에.

언젠가 아내 품에 안겨 펑펑 울어본 적이 있었다. 직장 생활 중 이래저래 쌓인 스트레스를 참아가다가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는데,  그때 내등을 말없이 쓸어내리던 사랑스러운 손길!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내의 내조 덕분에 공직생활의 명예도 갖게 되었고 화려하진 않지만 좋은 집도 구입하고 과분한 차도 타고 다닐 수 있어 행복하다.
그래서 배우 이영애 보다 내사랑 강영애가 더 이쁘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다.(하하하! 독자 여러분께는 너무나 죄송한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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