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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의 시초는 1555년 '가리포왜변'이다

[완도읍 특집]명종 때 호남일대 '을묘왜변'을 '가리포왜변'으로 개칭해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4.07 16:04
  • 수정 2018.04.0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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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가리포진'


왜구는 1555년 5월 11일 군선 70여척으로 가리포진을 함락하고 해남으로 상륙하여 호남일대를 휩쓸었다. 이 사건을 을묘왜변이라 하며 임진전쟁의 시초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을묘왜변은 “가리포왜란”이다.

이때 가리포진 첨사는 제24대 이세린이었다. 첨사 이세린은 자체병력으로 왜구를 막을 수 없어 전라병마사(전라도군 총수)에게 연락을 한다. 보고를 받은 병마절도사 원적(元績, ?~1555)은 장흥부사 한온과 영암군수 이덕견이 함께 가리포진으로 출전했다. 왜구는 군선 70여척에 병력이 1천명이 넘었다. 가리포첨사 이세린을 생포당하여 일본으로 끌려갔고 장흥부사 한온과 영암군수 이덕견이 전사하였다.

두 개 지역의 행정기관 수장이 순직했고 수군진 첨사가 생포되어갔던 사건은 조선조 역사에 처음이다. 따라서 '을묘왜변'은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가리포왜란'이라 하여야 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급하게 논의를 거쳐 5월 18일자 정걸(丁傑)을 25대 가리포진 첨사로 부임시킨다. 가리포진첨사로 부임한 정걸은 조선군사와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5월 25일 완전히 격파하였다. 그러고 36대 가리포진첨사로 다시 내려와 위급할 때 마다 가리포진을 지킨 가리포진장군이다.

정걸은 1555년 가리포진 첨사에서 1556년 부안 현감으로 자리를 옮기고 1561년 온성 도호부사가 된다. 1568년 종성 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족 정벌과 국경 수비에도 공을 세운다. 가리포왜란을 수습한 공로가 인정되어 경상우수사를 두 번 거치고 전라 좌, 우수사를 역임한 조선 수군의 핵심 인물이었다.

가리포왜란 후에도 임진전쟁 전까지 가리포진은 많은 전투를 하였다. 임진전쟁 5년 전 1587년에는 왜구들이 청산도에 침물하여 49대 첨사 이필이 출전하여 막아보았으나 역부족하여 병선 4척을 빼앗기고 일본으로 나포되어갔다. 이 때 청산도는 왜구들의 남해안 루트가 되어 전투가 빈번하였다. 그 증거로 청산도에 “피내리꼬랑”이라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임진전쟁의 전초전이 가리포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정에서 가리포진을 잘 만 살펴보았다면 임진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지금까지는 임진전쟁 전 이야기다. 임진전쟁이 발발하고 가리포진의 역할에 대하여 논 하고자 한다. 임진전쟁에서 가리포진의 역할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한 부분이 있다. 임진전쟁에 유명한 장수는 모두 가리포진을 거쳐 갔다.

최고의 수군장수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 구사직, 가리포진첨사 이응표, 이영남 등은 임진전쟁에 최고의 장군들이다. 이분들이 모두 가리포진 첨사를 역임하였던 장군들이다. 특히 47대 이억기는 19세에 가리포진에 부임하여2년을 근무하면서 선정을 하여 장흥부사가 되었으며 33세에 전라우수사가 되여 임진전쟁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신 분이다.

임진전쟁의 역사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난중일기에 가리포진은 70여회 등장한다. 이처럼 많이 거론된 지역을 난중일기에 가리포진 뿐이다. 이순신의 모든 전쟁사에 가리포진첨사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이며, 마지막 전쟁 정유재전에 가리포진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동기를 부여한 곳이다.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이영남첨사. 이영남 첨사는 58대 (1598년) 가리포진첨사로 부임한 장군이다. 이순신에게는 이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고금도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구축하고 7년 전쟁의 막바지 군비가 바닥나 군사들의 식량도 걱정할 시기에 인근 가리포진에서의 도움이 극히 필요로 할 때였다. 이순신은 자식처럼 사랑하던 이영남을 가리포진 첨사로 추천한다. 1598년 3월 이영남은 가리포진첨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진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자력으로 근근이 식량을 공급하면서 상왕산에서 붉가시나무로 천자총통의 대장군전(미사일)을 만들고 정도리에서 몽돌을 모아 조란탄을 비축하였다. 대장군전은 지금으로 보면 미사일이다. 우리나라에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일본에 노획물로 보관되어 있던 것을 진주박물관에서 빌려다 전시하였다. 대장군전 측면에 가리포 상 김등조(加里浦 上 金等造)라는 문구가 있어 우리는 보물 하나를 찾았다. 현물을 우리가 취득할 수 없어 완도문화향토연구사 배철지 님이 수개월 노력하여 붉가시 나무를 가지고 원형에 가까운 복원으로 현재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조란탄(鳥卵彈)이 또 있다. 새 알과 같은 탄환이란 뜻이다. 포탄으로 사용할 철이 부족하여 수마석이라 하여 정도리에 많이 있는 갯돌을 용도에 따라 선별하여 지자총통에서 황자총통까지 탈환으로 사용하였으며 근접 투석전으로 사용하였다. 고금도 덕동에는 그 잔해가 지금도 많이 있다. 이러한 무기가 임진전쟁의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에는 조금 미흡했다. 60-70년대 해조류가 돈이 되어 문화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지나는 순간 다른 지역에서는 소설속의 홍길동까지 포장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문화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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