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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읍엔 장보고유적 외 볼 것이 없다?[완도 명소]374년 역사를 지닌 가리포진(완도읍)에서 만난 '조선(朝鮮)'의 사적
박주성 기자 | 승인 2018.04.07 15:20
가리포진 객사(완도객사, 청해관)는 이중처마를 가진 전형적인 한국의 단층 건물로 수군 진 유적 객사로는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건물이며, 완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가리포진 객사(완도객사, 청해관), 현존하는 유일한 수군 진(鎭) 유적
완도읍 군립도서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가리포진 객사(완도객사, 청해관)는 이중처마를 가진 전형적인 한국의 단층 건물로 수군 진 유적 객사로는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건물이며, 완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객사(客舍)는 궐패를 모셔놓고 한양의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가 이루어지던 곳이며,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으로서 관아에 관련된 시설들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시설에 해당된다. 조선 경종 2년(1722) 가리포진 124대 첨사 이형이 창건해 궐패를 모셔놓고 삭망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를 올렸다.
고종 6년(1869) 가리포진 204대 첨사 이위소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삼문 중앙에는 1854년(철종 5)에 가리포진 196대 첨사 홍선이 쓴‘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1990년대 중반 도난당해 사진자료를 토대로 복원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09호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객사와 외삼문 등의 보수작업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명 '청해관'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객사 현판인‘청해관((淸海館)’은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신지도로 유배 온 원교 이광사의 글씨체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소학교로 쓰이다가 광복 후로는 국민(초등)학교 및 중학교 등으로, 그리고 향토방위군 교련장과 완도교육구청 청사로 사용하는 등 완도 역사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완도향교는 1897년 3월 착공을 시작해 8월 낙성식을 가졌다. 폐진 건물들의 목재를 운반하고, 벌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7년 10월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꿈에 따라 '조선'이라는 국호 아래 마지작으로 지어진 '향교'인 셈이다.

완도향교, 조선시대(고종 34년) 마지막 지어진 향교
조선시대 영암, 강진, 장흥 등지에 부속되어 있던 완도 지역이 독립된 행정체제를 갖춘 때는 1896년 2월 3일 칙령 제13호에 의해서다. 1521년 설진된 가리포진은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기 전 374년간의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수군 진으로서 역할에 막을 내리게 된다.
완도군의 창설 과정에는 갑신정변의 여파로 고금도에 유배 왔던 이도재 공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내무대신 박정양은 도서 지역 주민들이 부당하게 취급되는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완도군을 비롯해 돌산군, 지도군 등 3개의 도서군을 만들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신설된 군이 군청 관사보다 지역교육기관인 향교를 먼저 설립했다. 이유인 즉, 완도 설군의 공신인 문정공 이도재 공과 설군 과정에서 손발을 맞춘 완도 죽청리 태생 향도유사 침천 김광선 선생의 의지가 컸다.
당시 섬은 낙도 오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도 갖지 못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취약해 글을 몰랐다. 이로 인하여 천민 취급을 받고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괄시를 당했다. 배움에 대한 향수는 간절했고 절대적 가치였다. 독립한 완도 사람들은 육지와 같은 위상을 갖고자 했다. 여기에 김광선 선생은 “도덕과 인륜의 바람을 일으켜 섬사람의 오명을 씻고자 했다”고 ‘자서행록’에서 밝히고 있다.
군 초창기에는 재정의 곤란으로 착수할 수 없었으나 당시 탁지부(度支部, 조선 말기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와 제도(諸島, 여러 섬)의 도움으로 건설하게 됐다. 향교 설립은 죽청리에 터를 잡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죽청리에 장차 군청도 옮길 상정으로 관민이 협의하여 1897년 3월 착공을 시작해 8월 낙성식을 가졌다. 폐진 건물들의 목재를 운반하고, 벌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성전만 새로 벌목한 목재를 사용해 지었다. 동재는 고금진 동헌, 서재는 신지 동헌, 그리고 명륜당은 노화 동헌의 목재를 사용했다. 1897년 10월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꿈에 따라 '조선'이라는 국호 아래 마지작으로 지어진 '향교'인 셈이다.
1903년에는 유생의 강학을 위한 양사재를 군수의 도움으로 건설하고, 향안을 작성했다. 1934년 향교를 중수했으며, 1942년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1947년 동재를 중수했다. 그 뒤 1967년에 전면 보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고사(庫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완도향교는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최강 첨사가 가리포진 석장포에서 왜구를 완전히 물리친 후 왜구의 침탈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 전투로 임진전쟁이 최종 마무리됐다고 역사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 대첩비가 석장포 앞바다를 바라다 보이는 곳에 건립돼 있다.

의숙공 최강첨사 가리포해전대첩비, 임진전쟁을 가리포진 석장포에서 마무리하다
최강(崔堈 1559∼1614) 첨사는 고성 사람으로 임진전쟁에 민병을 모집해 진주와 고성에서 크게 공을 세운 사람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균(崔均)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金時敏) 장군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의 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최강 첨사는 임진전쟁이 끝나고 조정의 논공행상에서 그의 공을 인정해 정유전쟁이 끝난 5년 뒤에 59대 가리포 첨사로 임명 받았다. 임진전쟁의 큰 전쟁은 대부분 마무리됐지만 이후 정유재란 전쟁의 여파는 계속 이어졌다. 당시까지 외각 지역에서는 왜구들이 출몰하여 연안을 침탈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1605년 6월 8일 남망산 초소에서 연락이 왔다. 여서도 쪽에서 30여척의 왜 선단이 가리포쪽으로 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전갈이었다. 그러나 7년 전란으로 많이 약해져 가리포 병력은 150여명의 군선은 판옥선 한척과 병선 5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밀려오는 왜구선박은 30여척이 넘어 정면 대결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 제주를 거쳐 큰 배들이 바다를 덮을 만큼 많은 왜선이 시야가 좋은 석장포에 침입했고, 최강첨사는 군사를 매복시키고 마중가 도망가는 척하며 석장포로 유인했다. 조금 물 때와 만조시간과 석장포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지형을 이용, 일부는 내만으로 유인해 수십 척을 화공법(火攻法)으로 권응수와 정세아 등과 함께 적을 격멸시켰다.
일시에 피어 오른 불길은 30여척의 선박이 화염에 싸이며 겨우 3척만이 탈출하여 도망한다. 이 3척의 배를 석장리에서 완도와 제주 사이에 있는 추자도까지 추격하여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고 전멸시켰다.
노를 저어서 석장리에서 추자도까지는 이틀이 걸리는 장거리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희생된 사람이 없었다. 군선도 어디 한군데 파손된 곳도 없었다.
승전이 알려 지면서 조정에서는 크게 상을 내리고, 순천부사를 거쳐 경상수사(慶尙水使)로 영전하는 혜택을 얻는다. 그후 최강 첨사는 충청 수사를 거처 포도대장 까지 추천되었으나 본인이 사양하고 고성에서 생을 마감한다. 고성에서 최강 첨사가 사망했다는 전갈을 받은 가리포 유지들은 고성까지 찾아가 3년 상을 치루고 돌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강 첨사가 가리포진 석장포에서 왜구를 완전히 물리친 후 왜구의 침탈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 전투로 임진전쟁이 최종 마무리됐다고 역사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1816년(순조 16) 형 최균과 함께 병조판서에 추증됐고,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그 대첩비가 석장포를 바라다 보이는 곳에 건립돼 있다.
 

남망산 봉수대(南望山 烽燧臺)는 임진전쟁 당시 남해안을 순시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다녀간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1596년 윤 8월 24일 남해안을 순시 중에 가리포진성 뒤 남망산 봉수대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앞 바다를 가리키며 "참으로 이곳은 한 도(道)의 요충지로다"라고 감탄한 발언이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남망산 봉수대(南望山 烽燧臺),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다녀가다
완도 가리포진은 1521년(중중 16)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완도읍 군내리에 설치된 수군 진(鎭)이다. 이듬해 1522년 초대 수군첨절제사 이반(李班)이 부임했으며, 임진전쟁 때는 전라우수영의 6개 만호진(회령포·마도·이진·어란·금갑·남도포)을 관장했다. 정걸, 이억기, 이순신, 이영남, 최강 등 임진전쟁 당시 목숨을 걸고 조선의 바다를 지킨 수군 장수들이 모두 가리포 첨사를 거쳐 갔다.
완도읍 가리포진성 터 바로 뒤에 남망산 봉수대(南望山 烽燧臺)는 임진전쟁 당시 남해안을 순시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다녀간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가리포 첨사로 명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1596년 윤 8월 24일 남해안을 순시 중에 가리포진성 뒤 남망산 봉수대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앞 바다를 가리키며 한 발언이 남겨져 있다.
이충무공전서 권7 난중일기(亂中日記) 3의 기록에 실려 있는 이 발언은 “병신년 단기3929(1596) 윤8월24일 이충무공이 부사 한효순과 함께 가리포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먼저 와 있었다. 남망산(南望山)에 함께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참으로 이곳은 한 도(道)의 요충지이지만 형세가 고립되어 위태로워서 부득이 진영을 이진(梨津)으로 옮겨 합쳐야 했다”고 기록돼 있다.
 

명선욱 첨사 영세불망비는 철비로 세운 것이 발단이 돼 일제강점기 1942년 말경 완도 군외면 선착장에 이 철비를 부수어 당시 대동아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져가려 야적해 놓은 것을 항일교육운동가 김영현 선생이 조카 집으로 옮겨 놓는 등 곤혹을 치렀다.

명선욱 가리포첨사 영세불망비, 일제의 태평양 전쟁 전쟁물자가 될 뻔하다
완도군립도서관 뒷길을 통해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 오른쪽에 작은 철비(鐵碑)와 다시 세운 큰 석비(石碑)를 볼 수 있다. 작은 철비가 바로 227대 가리포진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선 시대, 각 진영에 속하였던 종3품 무관 벼슬)를 역임한 명선욱(明瑄煜) 첨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다. 명선욱 가리포첨사 영세불망비의 본래 명칭은 ‘행절제사 명공선욱영세불망비’로 1894년 10월에 세워졌다.
옛날에 지방 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서 기렸다.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비(頌德碑)라 하기도 하고, 수령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영세불망비라 하기도 했다.
명선욱 첨사가 가리포진 첨사로 발령을 받은 것은 고종 30년(1893) 1월 29일의 일이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가리포진이 폐진 되었는데, 마지막 이범규(李範珪) 첨사가 발령난 것이 1894년 7월5일이니 1년 반 남짓 근무한 걸로 ‘가리포첨사 선생안’에 나와 있다.
명선욱 첨사 영세불망비는 철비로 세운 것이 발단이 돼 일제 때 곤혹을 치렀다. 1942년 말경 완도 군외면 선착장에 이 철비를 부수어 당시 대동아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져가려 야적해 놓은 것을 군외면 출신의 항일교육운동가 김영현 선생이 인근 갈문리 배장사와 함께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근처 황진리 조카 김내호 집에 옮겨 두었다고 한다. 현재의 위치에 놓인 것은 해방 후 일이다.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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