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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가 고금도를 다녀간 까닭은?

[에세이-고금도에서]배준현 / 고금주조장 대표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3.24 17:07
  • 수정 2018.03.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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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현 /고금주조장 대표

임진왜란 때 우리수군의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 우리를 도우려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고금도를 찾아온 진린 장군,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여하고 왜란을 종결짓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지었던 사당이 충무사의 시작이다. 오랫동안 제향이 이어져 관왕묘부터 시작하여 정조때 탄보묘라는 현판이 내려졌으며 일제의 박해로 잠깐 제사가 중단되고 해방후 충무사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금도 충무사안에 있는 관왕묘비는 이곳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오래된 비석이다. 관왕묘비에 새겨진 글자들은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뜻으로 다가오는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관왕묘비는 그 존재를 알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이순신장군 관련유적들을 둘러보고 기행문을 썼다. 그는 고금도에 와서 관왕묘를 둘러 보았고, 관우신앙을 매섭게 비판했다. 또한, 관왕묘의 서무에 이순신장군을 배향한 것을 개탄했다. 그때 정전에 관우, 동무엔 진린과 등자룡이 그리고, 서무에 이순신장군을 배향하고 있었다. 민족의 영웅을 가장 아래에 놓았다는 것이다. 언뜻 맞는 얘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으로 조선의 민족성을 탓하고 지배계급을 비판한데서 한치도 나아가질 않았다. 오로지 영웅주의적 시각으로 이순신 영웅만들기에 치우쳐 있었다. 그가 이순신전기와 충무공유적지를 순례하면서 쓴 글들은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벌어진 민중의 저항을 애써 눈감고 있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나라에선 관우신앙이 장려 되었다. 이광수는 이러한 관우신앙을 비판하면서 중국과 단절을 바랐으며, 사대부들의 무능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은근히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 하고 있다. 서슬퍼런 일제 때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이순신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일제의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고도 속임수였다. 나중에 누구보다 앞장 서 친일행각을 벌였던 이광수의 언론플레이다. 이광수가 고금도를 다녀간 까닭이다. 요즘 뉴라이트와 같은 맥락이다.

시대의 필력이 이순신을 이용해 민중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라고 일컫는 사람들, 이광수, 박정희 따위가 오직 이순신 영웅만들기에 집착하는 것, 아이러니이며 소름돋는 일이다.
 21세기, 관왕묘비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광수가 개탄해 마지 않았던 관왕묘는 이제 충무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정전에 이충무공, 동무에 이영남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이제 관우나 진린, 등자룡을 배향하지 않는다. 관우신앙을 장려했던 조선조가 아닌 지금 동북아시아 세나라는 또다른 조건아래 서로 교류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정치, 외교, 경제의 파트너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400여년전 이순신과 진린의 우정을 이야기하며 한.중 긴장관계를 풀어가고 있다. 문재인대통령이 완도군에서 이순신장군과 진린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때를 맞추어 우리군은 고금면 묘당도에 충무공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중장기 사업계획에 따라 추진하고 있고 이 사업의 일환으로 관왕묘 재건과 정유재란 테마 전시관, 충무공과 진린장군 동상을 우선 건립할 예정이다. 관왕묘 재건으로 머지 않아 관우, 진린, 등자룡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면서 버려져 있던 것들을 되살리고, 우리시대에 새롭게 다시 보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한중일 세나라의 역사, 문화 탐방객에게 정확한 역사인식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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