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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최고의 군사기지, 완도를 다시 복구하자!

[완도 시론]노기욱 / 전라남도이순신연구소 소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3.23 19:16
  • 수정 2018.03.2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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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욱 / 전라남도이순신연구소 소장

완도는 2021년이면 군영 설치 500년이 된다. 1521년(중종 16) 완도는 가리포진성이 축성되었다. 이외에도 차례로 마도진(고마도) 1417년, 삼도진(노화도) 1546년, 소안도진 1627년, 신지도진 1660년, 청산도진 1677년, 고금도진 1681년 완도 전지역에 군사진이 설치되었다.

그만큼 완도는 조선시대 큰 역할을 자임한 곳이었다. 고마도에는 1555년에 조선에 조총을 받치면서 귀화을 요청한 왜인 대마도 사람 평장천(平長親) 왔었다. 가리포진 선소에는 내자전선 1척, 거북선 1척, 방패선 1척, 병선 2척, 사후선 4척, 가왜선, 수토선 6척이 활동하고 정박하였던 곳이다.

가리포진 1521년 이반(李班) 첨사가 부임한 이래 374년간 227대의 첨사가 부임되었다. 특히 1591년(선조 24) 이순신 장군이 가리포 첨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 1596년 윤 8월 24일 이순신 장군은 완도 가리포진 남망산에 올라 “참으로 전라도 제일 요충지이다.” 라고 하며 정찰을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5년 7월 15일 군제개혁으로 폐지 되기에 이르렀다. 1896년 2월 3일 완도군이 설치 확정되어 신임 군수 이규승(李圭昇)이 도임하였다.

가리포진성에는 동·서·남·북문이 있었으며 동·서·남망 봉수가 있었다. 산비탈에서는 녹나무로 거북선 부재를 제작하고 가리포 가시나무 대장군전, 쌍혈총통을 만들었다.

가리포진의 성문은 '여지도서와 '군현지도(1892년)'에서 2개소로 나타난다. 이후 '완도군읍지(1899년)'에서 3개소로 증설된다. 이어서 '호남지(1935년)' 누정조에 에서 4개소로 확대되었다. 4대문은 청해루, 연일루(동문), 첨극루(북문), 망미루(서문) 이다.

가리포진 관아의 부속건물은 '호남진지(1895)' 가운데 '가리포진지(1895)'에 의하면 선소, 군기고, 세미고, 환미고, 관청고, 군관청, 장관청, 진무청, 사포청, 사령청 등이 있었다. '전라남도완도군읍지(1899)'에서는 동헌 7칸, 내삼문 3칸, 외삼문 3칸, 내동헌 7칸, 폐문루 4칸, 향장청 6칸, 순교청9칸, 서기청 8칸, 형리청 3칸, 사령청 4칸, 환미조고 7칸, 군기고 3칸 등이 있었다. '호남지(1935)'에 나타난 관아 건물은 청해관, 동헌, 내아, 책실, 향사당, 연청, 형청, 관청, 서청, 훈련청, 장청, 통인청, 교방청, 군기청 등이 있었다.

'동아일보(1928)' 7월 31일과 8월 1일 도서순례기에서 성내에는 청백당, 책실, 향사당, 군관청, 연청, 추청, 장방청, 관로청, 사령청, 습사소 등이 나타난다. 오늘날 남아 있는 건물은 객사인 청해관만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완도에는 진린, 등자룡, 계금, 왕사기 등 중국 고위급 지휘관 들이 머문 곳이있다. 그리고 15000여명의 중국군과 500여척의 중국 명나라 수군 배가 정박하였다. 이들이 정박할수 있었던 한·중연합군 기지와 조선수군삼도통제영이 자리였던 것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도 중국 베이징대학교를 방문하여 강연하면서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완도군을 제일 중요한 역사적 증거로 강조하였다. 최근 전남도에서는 문재인정부 이순신장군 호국벨트 관광 공약사업을 실천하기 위해 후속 조처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로웠던 옛 완도의 역사는 시대를 달리하며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가리포진성 일부 복원 가능한 구간 남문·서문을 복원하여 관광 콘텐츠방안으로 활용하는 기폭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먼저 가리포 대장군전이나 가리포거북선 등을 조형물로 상징화하는 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완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이를 복원해야하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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