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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공장에 엄마는 아픈 발을 동여맨 채로...

[에세이-고향생각]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2.15 13:57
  • 수정 2018.02.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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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면서 새롭게 다짐한 것들이 몇 가지 생겼다. 그 중에 하나는 휴일에도 일찍 일어나 동네를 산책하는 일이다. 운동도 되겠지만 미명이 주는 설레임은 마치 살아있는 오늘이 기적처럼 나를 환희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요한 새벽을 따라 걸으며 모네가 그랬듯이, 빛에 따라 황홀하게 변신하는 풍경들을 지켜보며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모두 다 그러했겠지만 어릴때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역이던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엄마가 갑자기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셨다. 진단결과를 알려주진 않았지만 심각하단걸 어렴풋이 알았다. 푸념처럼 내뱉는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았고 그것은 미역로스였었다.

"민서야 얼릉 일어나라~" 아버지는 꼭두새벽부터 나를 깨웠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부벼가며 미역자루들을 리어커에 실어 선창가에 끌어다 놓았고 아버지는 인부들을 모아 바닷물에 깨끗하게 씻어 말렸다. 그 시절 집 안밖에 널려있던 미역들은 나에게 상당히 귀찮은 일거리였었다. 우리집은 물론이고 완도에서는 미역이 제일 흔했다. 언니는 고등어조림에도 무우나 시래기 대신에 미역줄기를 넣어 조렸고 오돌오돌 씹히는 맛이 나름 별미였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건미역을 봉지에 담거나 미역줄기를 염장하는 일로 늘 바빴던거 같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던 그 미역이 어느덧, 먼 이국땅에서 내가 그리워하는 고향의 향기를 지닌 음식으로 변신해 있었다.

 "미역국이 엄청 맛나네!" 여기저기에서 후루룩 미역국을 마시며, 밥에 말아 떠 먹으면서 하시는 말씀들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교회 식사봉사 때 마다 미역국을 끓이고 있다. 내가 끓이는 미역국이 모두들 최고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레시피를 물으러 오기도 했다. 끓이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해 줘도 이 맛이 안 나온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완도댁이 확실한가 봐!" 하며 깔깔깔 웃었다.

어쩌면......, 나는 미역 속에 나의 아린 슬픔과 그리움들을 묻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연둣빛 같았던 열 세살 때에 엄마가 아팠다. 자리에 누우신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셨다. 나는 엄마의 등 뒤에 머리를 기대고 웅크린채 몰래 눈물을 삼켜야만 했었다. 병석에 누워계실 적에도 엄마는 늘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시곤 하셨다. 엄마의 그 애잔한 눈빛을 닮은......, 그 빛! 그것은 미역이 간직한 눈빛이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왜 내가 그토록 미역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미역 속에서 다시금 엄마를 발견하고 있는지......

완도에 미역공장이 시작되던 70년 대에 엄마는 아픈 발을 동여맨 채로 미역공장에 다니셨다. 더 이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무렵에는 우리가 누워계신 엄마곁에서 건미역들을 포장했었다.

오늘도 참기름에 달달 볶아진 미역이 자작하게 부어진 물 속에서 연둣빛 뽀얀 국물로 변신하고 있었다. 나는 안다. 엄마의 그 애잔한 눈 빛!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그 사랑의 마음을, 그리고 오늘도 나는 미역 속에서 다시 엄마를 그려내고 있었다.
 

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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