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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 선교사와 인연, 완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완도의 문화유산]113년 역사, 완도 기독교 성지 '약산제일교회'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8.02.15 09:07
  • 수정 2018.02.15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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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오웬 선교사와 인연으로 설립된 113년 역사를 지닌 완도 약산면 관산리 '약산제일교회(관산리교회)' 모습(최초의 교회는 초가집이었고, 사진의 모습은 1970년대 재건축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복음(福音)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한자어로 풀이한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한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약산면 관산리에 가면 완도 최초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럽 중세의 작은 성 같은 오래된 교회 건물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최초의 교회 건물은 사라지고 없으나 바로 완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첫 교회인 ‘약산제일교회’다. 역사가 무려 113년이다.

약산제일교회 100주년 기념탑(정면).
약산제일교회 100주년 기념탑(옆모습).
약산제일교회 100주년 기념탑(뒷면).


약산제일교회의 설립 역사는 1904년 오웬 선교사의 전도인 노학구에 의해 복음이 시작됐고, 1905년 오웬 선교사가 약산 관산리로 들어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정식 교회가 세워졌다.

1914년 첫 당회가 열린 것을 시작으로 기록이 시작된 당시 당회 기록에 당회 구성 이전 연혁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1904년 10월 16일 본도인 정만일 씨가 노학구씨를 청하며 처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전파하다”

“1905년 6월 미국 선교사 오 목사(오웬, 한국명 오기원)가 예수의 도리를 전함으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 사오명이 있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지라”

“1906년 9월 20일 오 목사께서 다시 와서 더욱 믿으라고 권면한 즉 우상 거절한 장윤재 씨가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오웬 선교사의 모습.

1898년 11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해 전라도 구석구석을 순회 전도하며 교회를 설립한 오웬 선교사. 그가 섬 지역을 찾아 관산리에서 세운 초기 8칸 초가 교회는 20명으로 시작됐다.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 신도가 늘어나고 조약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후 관산교회의 이름을 갖고 현재 약산제일교회 이름으로 교회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약산제일교회는 당시 서양 문물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여 완도, 고금, 약산, 금일, 생일 지역 뿐 아니라 육지의 장흥, 강진, 해남 등지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약산제일교회 기념비에는 완도 관산리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거쳐 갔는지 알 수 있다. 오웬, 맹현리, 류서백, 조하파 선교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은 다 조선에 와 기독교 복음을 뿌린 선교사들이다.

오웬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 선교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 가문 중 특히 명문으로 언급되는 곳은 언더우드가와 유진 벨 가문이다.(4대에 걸쳐 한국 선교 담당) 그 중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는 목포 선교부에서 활동하다 1904년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면서 주로 전라도 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 서북쪽, 오웬 선교사는 광주 남쪽과 서남쪽 방향(현재 전남 서남부지역) 순회 선교를 맡았다.

190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 가족,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주민을 초청해 40여명이 함께 예배 드렸는데 이것이 광주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의 시작이다. 유진 벨은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자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의료활동 그리고 교회개척에 힘썼다.

오웬 선교사는 완도를 비롯해 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 선교지역이었는데 순회 선교를 나가면 보통 한달씩 걸렸다고 한다. 때로는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430여명에게 교리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전라도 지역 사역은 매년 빠르게 성장했다.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는 25개 구역의 거대한 지역을 담당했다. 5년 동안 예배처는 4개에서 77개로 늘었고, 세례교인은 72명에서 1,50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을 통해 광주 송정리 교회(1901년),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가 설립됐다.

그러던 오웬 선교사는 1909년 이른 봄 장흥지역을 순회 전도하던 도중 어느 시골마을에서 과로로 인하여 쓰러졌다. 급성폐렴이었다. 몇 명의 신도들이 달려와 광주로 데려가 한때 병세가 좋아졌으나 바로 얼마 후 상태가 악화됐고 4월 3일 저녁 오웬 선교사는 생을 마감했다.
 

호남신학대학교 선교사묘지에 안장된 오웬 선교사.

광주 기독병원 간호전문대학 내에 있는 오웬 기념각이 있다.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전남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와 광주에서 순교한 오웬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친지들이 보낸 기금 4,200 달러로 1914년에 세워진 연면적 434평방미터(부속건물 포함)인 양옥건물이다. 이 건물은 평면 형태로 보아 예배당 및 집회실로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되나, 지금은 기독병원 간호전문대학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웬 선교사는 생전에 그의 할아버지 기념병원을 지으려다 선교 활동이 급하다고 판단하여 먼저 할아버지 기념각을 지을 계획을 수립 하였으나, 그 계획이 추진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기념관 현판에 할아버지 WILLIAM L.의 이름이 새겨진 것도 이 때문이다.

오웬 선교사의 숭고한 기독교 정신이 스며 있는 약산제일교회는 완도의 기독교 성지라 불러도  전혀 손색없는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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