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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나의 반쪽]박춘희 독자(양광용 재경향우회장 부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2.15 09:02
  • 수정 2018.02.1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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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희.양광용 부부.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왔을까?
그건 마치 우주가 생겨날 때 처럼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은 물방울 하나가 터질 때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빠르게 팽창되어 생겨난 우주처럼그렇게 사랑은 왔다.
하지만 누가 사랑이 왔을 때를 온전하게 기억하는가? 그 시간이란 너무 짧으면서도, 황홀하게 길어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 팽창된 우주 한가운데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놀라운 일.
오늘 만나고, 내일 생각하고, 그 다음날 전화하고, 그 다음날 연락 이 없고,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운명처럼 사랑하게 되고...
눈꺼플이 올라갔다 내려오기 전에 정지하는 순간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바로 그 정지해 있는 시간의 백만분의 일 정도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그렇게 왔다.
우리는 학교 동창이면서 동문이었다. 남편은 약산면 출신으로 고금도에 유학을 왔고 나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고금종합고교를 함께 다녔다.
물론 그때는 잘 몰랐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란 것도. 그리고 사랑하게 될 것이란 것도.
나는 고교 졸업 후, 서울에서 농림수산부에서 근무하면서 서울 생활에 대한 낯설움과 함께 고향을 동경했다. 그때 고향 친구들 몇몇과 연락하면서 가끔씩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 남편이 함께했다.
지금도 그러하듯 남편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누군가를 휘어잡는게 아닌 온유하고 깊이를 찍는 방점으로써 따르게 하는 사람.
그의 이름은 양광용.
고향의 추억들을 매개체로 대화의 물꼬가 터졌고, 어느 덧 둘만의 데이트에서 남편의 고교 짝사랑이 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의 학창시절 기억 속에 난, 여신이었다고. ㅎㅎ
연애기간은 한 5년 쯤 되었고, 특별한 위기는 없었다.
그는 늘상 기다려주고 기다려주는 자상한 성품의 소유자로, 큰 덕성을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새침하게 튕겼던 것 같은데, 물론 표시 나게 한 건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게 됐고, 결혼을 꿈꾸게 됐었는데, 막상 결혼을 하려할 땐 친정 어머니께서 옛날 분이라 그런 지 "신랑 신부의 나이 차이가 너무 없다"고 반대 입장이었다.
어머니는 "적어도 3~4살은 차이가 나야 남편에게 사랑을 받을 것인데, 네가 막내라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걱정이다"고.
하지만 친정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내가 끝까지 반대했으면 정말로 큰일 날 뻔 했다. 저처럼 반듯하고 심성이 저리 고운 사람은 다시는 없다. 춘화야? 네가 더 잘하고 살아라"
그렇게 가정을 이루면서 1남 2녀를 두었고, 86년에 큰딸을 낳은데 이어 둘째딸과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 막내 아들은 92년생으로 부모의 바람대로 잘 커주었고,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결혼 생활의 위기나 경제적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 다만,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이 저렸던 순간은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던 순간. 그리고 내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말이다.
큰 애가 11살 때, 벌써 20년 전의 일. 남편이 37살 나이에 종합검사를 받고 난 결과.
위암이었다. 지금이야 암도 너무도 흔해 갑상선암은 착한 암이라고 할 정도지만, 그때 암에 걸리게 되면 정말로 시한부 생명이라도 되는 듯 흔치 않았다.
검사결과가 나오고 남편의 말 "암이라네!" 나즈막히 들려오는 음성. 아! 티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야기가 내 가족에게서 나타나다니,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고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때 남편의 뒷모습 조차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이 아려와 출퇴근 시에도 그의 뒷모습을 안보려고 했다.
다행이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의사도 초기에 발견 돼 천운을 타고 났다고 말해주었다. 이후 남편은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쓰면서 삶의 방식 또한 크게 바꿨다. 더 사랑하고 더 나누는 삶으로...
세월호 사고 당시에도 남편은 옷을 가지고 해남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나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더니, 짐을 트럭에 싣고 가야하니, 트럭의 조수석을 타고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때 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녀올려 했는데, 남편은 유가족들이 아파하는 모습에 그러면 내가 편할 수 없다고 했다.
고향일이라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는 남편.
남편이 말한다. "여보, 우리 죽을 때 싸들고 가는 것도 아니니까 더 그리고 더 나누고 삽시다"
그리해 지난 1월에는 완도지역에 써 달라며 전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각각 1억원 기부를 약정하면서 부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등록됐다.
주위에선 박수를 쳐주기도 하지만 시샘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진심이란 나 안에 있기에 괘념치 않는다. 그 진심과 함께 고향에 대해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며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양광용 남편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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