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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를 잠재운 고금도 '진린 도독'

[역사 칼럼]정영래 완도문화원 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12.30 17:51
  • 수정 2017.12.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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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문재인 대통령은 금번 중국방문에서 한국과 중국의 공통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중에서 특별하게 관심을 끄는 것은 지난 15일 베이징 대학에서 완도의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의 완도군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지금 진린 장군의 후손들이 2천여 명 살고 있기도 합니다.”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은 중국의 광동성 출신이다. 1597년 정유재란 시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고 병력 5천과 병선 400척을 이끌고 조선의 고금도에 들어와 이순신과 더불어 크게 전공을 세운 사람이다. 이것을 조명연합수군이라 한다.

조명연합수군은 지금의 한미연합사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맞다. 명나라의 지휘하에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수군의 총수는 진린인 샘이다. 진린은 수군을 총지휘하면서 처음에는 이순신(李舜臣)과 불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지휘능력에 감동하여 수군에서 만큼은 이순신에게 모든 지휘권을 주었다. 그리고 진린은 이순신을 도와 전쟁을 수행하였다. 임진전쟁 7년의 마지막 전투는 이순신의 지휘하에 승리로 끝이 나는 순간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진린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이순신 함선에 찾아왔다. “이 장군 전쟁이 끝이 났소 빨리 나오시오.” 이때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뱃머리에 나와 “장군님은 전사하시었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방금까지 나를 살리고자 분투하시던 장군이 돌아가시다니” 하면서 뱃장을 치면서 통곡한다. 이순신 함선에 올라온 진린은 시신을 확인하고 이승에서 이순신과 고별을 하였다. 전쟁은 끝이 났다. 이순신은 이 세상에 없다. 다시 진린은 수군을 총지휘한다.

제일 먼저 하였던 일이 전장을 수습하고 이순신 및 같이 전사한 장수들의 유해를 남해에 안치하였다. 이틀 후 남해에서 철수하면서 이순신과 이영남의 유해를 고금도로 옮기게 된다. 원칙적으로 따지고 본다면 이순신 유해는 덕동으로 왔어야 한다. 그러나 진린이 직접 챙겨왔기 때문에 진린 진영인 묘당도로 오게 된 것이다.

고금도는 역사의 현장이다. 삼도수군통제영 고금도진과 조명연합군 묘당도 진영은 7년 전쟁을 마무리한 곳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관심이 없다. 승리하였던 전쟁터는 많은 투자를 하여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러나 병력을 모으고 병참을 준비하여 전쟁에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고금도를 이처럼 오래 방치하여 두고 있다.

지금까지는 완도군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이순신호국관광벨트사업과 명나라 진린 도독을 거론한 것으로 지금이 기회이다. 현재는 이순신이 진린 묘당도에 접방살이를 하는 꼴이다. 덕동에 있었던 삼도수군 통제영을 복원하여 이순신 호국벨트사업에 접목시키고 진린의 관왕묘와 명나라 수군진영을 복원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문화를 한꺼번에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2014년 7월 중국국가수석 시진핑은 한국을 방문하고 서울대학에서 특강을 하였다. 강의 내용은 중국과 한국의 전래되어 왔던 우호관계에서 침략국 일본을 양국이 협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역사 속에 진린 도독을 거론하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사드관계로 진린은 수심으로 잠기고 말았다. 다시 문제인대통령이 “완도군에 이순신과 진린을 모시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서 사드를 수심으로 잠제우고 양국의 우호를 강조 하면서 다시 진린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기회는 많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왔을 때 포착해야 한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 하나하나 검토하여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사업계획을 수립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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