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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과 윤행임 그리고 순교의 땅 송곡마을

[유배 인물]신지 송곡마을과 윤행임 2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12.01 09:50
  • 수정 2017.12.0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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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이 준공될 무렵인 1898년의 모습. 오른쪽에 이미 8년 전에 준공된 주교관이 보이고 그 앞에 작은 한옥 건물이 지붕만 살짝 보인다. 가로로 긴 건물이 한때는 서당, 또 한때는 수녀원과 고아원으로 쓰인 윤정현의 집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20년대에 성가 기숙사를 지으면서 철거되었다고 추정된다. 출처 : <백년 전의 한국>, 가톨릭출판사. 1986
신지 송곡마을 윤행임 유배지로 추정되는 가옥.


살점은 너덜거리고 두 어깨뼈가 부스러지고 등뼈는 으스러져 허옇게 드러났다. 이렇게 참혹한 상태로 그는 옥으로 다시 끌려갔다.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만족과 기쁨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옥졸과 아전과 포졸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였고, 며칠 후에 한 교우가 그를 보러 옥을 찾아 왔으므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베드로였다.

"이 죄인은 매맞은 것을 느끼지 못하니, 끝장 낼 방법이 없소."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저는 매맞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여기 계셔서 저를 직접 굳세게 해 주십니다.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
원시장 베드로를 얼려 죽이려고 물을 퍼부어 추운 밤중에 밖에 내놓자 얼음으로 뒤덮인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베드로.

순교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죽음이란 최고의 자기희생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음같이 한사람의 희생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므로 이는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최고의 명예는 순교자의 반열에 서 있는 것입니다."

200여 년 전, 윤행임은 신지면으로 유배되었다(신유사옥). 전라도 관찰사가 된 지 닷새 만에 오른 유배길이었다. 시파의 중추적 인물이던 그가 결국 벽파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배후는 정순왕후.

사실 그가 탄핵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88년부터였으니, 스물여덟 살부터다. 이때는 성환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벽파의 공격으로 고양으로 유배되었지만 1794년에 풀려 이조참의에 재임명되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1800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대제학이 되었으나 이듬해 윤행임은 신지도로 유배왔다.

직전 2월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도 신지도에 유배된다. 이들은 어떤 관계이었을까? 두 사람은 어찌하여 똑같이 신지도로 왔을까?
정약전은 11월에 흑산도로 이배되는데, 둘다 서학을 했다는 죄목.

윤행임은 바로 약전이 이배 되는 두달 전 9월에 이곳에서 사사(賜死)된다.
순교였다. 신지도 유배 넉 달 만의 일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는“특별히 감등(減等)의 법을 좇아서 신지도에 도배된 죄인 윤행임에게 사사하라”고. 윤행임은 신지도에 오자‘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뜻에서 거처를 ‘불기헌’(弗欺軒)이라 하고‘신호수필’(薪湖隨筆)인 <석재별고>(碩齋別稿) 23권 11책을 저술했다. 여기에는 ‘신지도기’(薪智島記)도 포함됐다. 유배 뒤 불과 넉 달 만에 쓴 저술로 죽음을 앞두고 초연하게 쓴 것들이다.

그리고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성지로 군부독재시절에도 치외법권지역으로써, 시위로 인한 수배자들의 은신처 역할도 담당했다.

1909년 12월 이재명 의사가 벨기에 황제 레오돌프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던 이완용을 저격한 것을 시작으로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했는데,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에 병영시설로 징발당하고 성당 지하에 있는 순교자묘역이 수색당하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75년 2월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및 국민투표거부운동을 비롯, 이듬해인 76년 3월1일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돼 문정현 신부등 7명의 사제와 함석헌, 김대중 등 민주인사 18명이 구속되는 시련을 지켜봐야 했던 곳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명명된 민주화의 불길이 번지면서 명동성당은 시위 1번지로 변모했다.
한겨레의 기사를 보면 이곳 명동성당터는 윤정현의 집터였고, 옛 조선교구가 이것을 사들여 성당을 지었다고 한국 가톨릭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고. 이 윤정현의 집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발굴조사에서 조사단은 이곳 명당성당터가 윤정현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판단했지만 천주교 쪽 기록에는 이곳이 윤정현의 집터였다는 기록이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단다. 이 윤정현의 부친이 바로 윤행임이다.

이곳 명동성당터는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사사된, 말하자면 이곳은 순교자 윤행임의 집터다. 순교자의 집터에 성당을 지은 것이다.(남원윤씨문중에서는 윤행임 때부터  살았다고 증언)
윤행임은 헌종 초에 신원됐다.

윤행임의 아들 정현이 늦은 나이인 51살에 출사하면서 고속성장을 하고, 홍문관 대제학과 병조판서, 철종시대에는 규장각제학이 된다. 그리고 그가 죽기 1년 전인 1873년에 고종은 그에게 저택을 하사하였는데, 대원군이 섭정을 마감하면서 고종이 직접 왕권을 챙긴 해이다.

고종은 왜? 순교자 후손에게 그 저택을 하사했을까? 명동성당은 왜 하필 그 터에 세워졌을까? 그리고 그가 순교한 신지면 송곡마을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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