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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설군의 뿌리 '고금도'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마지막을 만나다[고금 특집]꼭 가봐야할 고금도 '관광명소'
박주성 기자 | 승인 2017.12.01 08:34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조·명 연합군 사령부가 있던 곳
고금도 관광 1번지다. 지금은 간척지로 매립돼 육지가 된 묘당도이지만, 40~50년전까지만 해도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가 20리 안팎이었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해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냈던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서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고흥 등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이때 우선 본영을 건설하고 피난민들을 거두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간인도 수만 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10배나 되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 수교(왜교)에 침몰한 왜적을 소탕하고, 다시 10월 9일에는 고금도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가 11월 9일에는 함대가 노량을 향하여 출진하여 충무공이 11월 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 아침, 54 세를 일기로 순국하여 묘당도 충무사 맞은편 월송대로 유해를 83일간 봉안하였다가 그 이듬해 1599년(선조 32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고 한다. 아직도 이 터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또한 명나라 수장은 장군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이곳에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충무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완도 설군의 일등공신 '이도재 공 적거지'

이도재공 적거지, 완도군 설군 일등공신 유배지
이도재공의 적거지는 임오군란(1882년) 당시 개화당이 개화에 실패하자 간접적으로 관련된 이도재공(당시 5위도총부후군)은 고금면 대평리(현 덕암리)로 유배 되었는바, 유배 와서 주민의 선도 및 후배양성 등으로 주민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계기로 이도재 공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들어서자 9년 유배생활이 해제되고 조정에 벼슬을 받았다. 섬사람들의 애환을 잊지 않고 행정구역 완도군을 만드는 설군 활동을 하여 1896년 2월 3일에 완도군이 탄생하기까지 공헌이 큰 이도재공의 귀향집이 바로 고금면 덕암리에 현존하는 이도재공 적거지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로 가서 전봉준을 생포하는 공(?)을 세웠고, 1895년 관제개혁 때 전주부 관찰사로 옮겼다.
군부대신, 학부대신 등을 역임했으나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다시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4년(광무 8년)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민간실업자와 조신(朝臣) 중의 유력자를 모아 농광회사(農鑛會社)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척은 일본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1907년(광무 11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의 양위에 관해 논의하기 위하여 어전회의가 개회되자, 질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이 양위하자 박영효, 남정철(南廷哲) 등과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 2연대의 지원으로 같은해 7월 20일, 고종의 양위식때 고종의 양위를 결정한 신하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2005년 8월 3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완도군에서는 이도재공의 유배 공간과 학문전수, 완도군의 설군 노력을 기리기 위해 2003년 적거지를 향토유적으로 지정하고,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5칸의 안채와 3탄의 사랑채를 초가로 복원하였다.
 

고금도 지석묘(고인돌) 군.

고금도 지석묘(고인돌)군, 청동기 시대 도서지역 매장문화 자료
지석묘(고인돌)는 청동기를 대표하는 무덤유적이다. 고금도 지석묘군은 도서지방의 최대 밀집지로 가교리, 청용리, 덕암리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고금도 일대 지석묘에서 마제석검과 칼돌·대팻날 등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내륙 지역과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금도 지석묘군은 청동기시대 도서지역의 매장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이 지석묘군은 완도군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밀집된 유적이다. 일부 지석묘가 도로에 절반 가까이 매몰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완도 고금도 지석묘군은 도서지방의 최다 밀집지라는 점도 특징이 있으며 일부분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도서지역의 특징을 고려하여 고금도 지석묘군으로 일괄 지정하여 보존 관리할 가치가 있다.
 

고금 5원사 중 '영모사' 전경.

고금 5원사, 은은한 배움과 유학의 향기 머문 그곳
현재 고금도는 완도에서 유일하게 5곳의 사당이 있다.(충무사 포함하면 6원사)
1881년 건립된 영모사는 연동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홍병례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홍병례선생은 산수지리학에 아주 능통하였으며, 영모사에서 학문을 가르쳐 고금도에 많은 후학들을 배출시켰다. 매년 음력 9월9일 제향하고 있다.
1927년 건립된 덕암사는 역동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고려 원종 임술(1262년)에 동양사상의 연원이요, 유교의 최고경전인 주역을 중국 사신 왕래 길에 암송하여 전파한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덕산사는 1957년 건립됐다. 을방공 25세손이고 참판공파인 양재홍·양연수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선생은 현종 13년(1847년)생이며 소년시절에 한학에 근취하여 사서삼경 및 무노가체에 능통했다고 전한다. 
숭유사(崇孺祠)는 매년 3월3일(음력) 5명의 훈장 선생님의‘계도(啓導)와 명덕(明德)’을 주제로 제자들과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가교리에 위치한 숭유사는 서기 1924년 3월에 건립된 곳으로 5명의 훈장 선생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봉암사는 1954년 건립됐는데 석포 강인수 선생 부친과 두남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지난 80년 전부터 지역에 있는 제자들이 한학을 존중하고 훈장 선생님의 깊은 뜻을 기르기 위해 제사를 모시고 있다는 곳이 바로 5원사이다. .
사라져 가는 선조들의 지혜와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관심이 필요한 만큼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맥을 잇는 중요한 곳이다.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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