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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어색함, 까칠함! 그러나

[가을특집]가을, 완도 그리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11.17 16:02
  • 수정 2017.11.1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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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필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경이로움인 그 펜촉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처럼 번쩍였는데 수천개의 주름과 금,은으로 된 그 바로크풍의 자태는 나를 흥분시켰다...나는 그와 같이 경이로운 물건을 갖는다면 소설에서부터 백과사전, 그 어느 곳에라도 배달할 수 있는 편지 등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남몰래 확신했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중에서

<레미제라블>을 탄생시킨 빅토르 위고의 명품 만년필을 선망하는 소설 속의 내용 중 한 부분이다. 등대처럼 반짝이며 설원같은 백지 위를 미끄러지고 싶어하는 펜촉과 내 손아귀에 꼭 맞는 관능적인 몸매를 한 만년필을 찾아 나도 가끔 문구의 만년필 코너를 헤맬 때가 있다. 아직은 내 인생의 명품이라고 부를만한(가격과는 상관 없이) 만년필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나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꿈꾼다. 그가 와준다면, 나도 이 세상의 어떤 책도 못쓸 것이 없으며, 누구에게든 못쓸 편지가 없다고.

만년필과의 첫만남은 중학교때 선물받은 파일롯트 만년필이었다. 그 후, 만년필을 자주 쓰게 된 건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밑줄 그은 것을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제 내게 만년필은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벗이다.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펜과는 달리 펜촉에서 느껴지는 감수성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 까칠함, 그리고 길들여가며 점차 내 손에 익숙해지는 느낌...

글씨를 쓰는 동안 만년필과 나는 호흡을 맞추어야 하고 끊임없이 서로 바라보는, 혹은 접촉하는 각도에 대해 의견을 조율해야하고, 같은 대상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 종이에 스치는 그 독특한 감각은 글씨 쓰는 맛을 알게 해준다. 물 흐르듯이 쓰여지는 펜보다는 약간 사각거리는 펜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사각거리던 펜촉도 유유히 닳아서 물 흐르듯이 흐르는 중년의 냄새를 풍긴다.

필통에서 만년필을 꺼내든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펜이다. 펜촉은 내 마음을 기억한다. 그리하여 하염없이 쓰여지고 싶어한다. 가을이니까. 이 가을에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 한 줄 끄적이기 위해...지금 만년필은 내 손에서 춤추고 싶어한다. 이 가을, 당신에게.....하고 만년필은 편지의 첫구절을 속삭여 준다.
 


#. 편지
동화작가 수잔 마츠이의 작품 중에 <편지>라는 단편 동화가 있다. 숲에 사는 들쥐와 담비가 주고받는 나뭇잎 편지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닭의장풀즙으로 쓴 자작나무 잎사귀 편지, 자주색 뽕나무 열매의 즙으로 쓴 편지....

오늘 매발톱꽃을 보았다거나 곤줄박이 깃털을 발견했다는 소소한 내용의 짤막한 편지이지만 새로운 눈으로 발견한 일상의 즐거움을 친구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 한 줄의 문장에 다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의 백미는 결말부분이다. 들쥐와 담비처럼 편지를 주고받고 싶은 숲속의 다른 동물들이 바람과 햇살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서, 숲속의 모든 나뭇잎들이 나무가 건네는 편지라는걸 발견하고 행복해하는 장면이다.

"이건 틀림없이 무슨 편지야," 담비가 말했습니다. "나무가 보내는 편지야." 들쥐가 외쳤습니다. "이것봐. 이것도 전부 편지같아."

토끼는 같은 수풀 속 쑥잎을 보며 말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잎사귀들은 모두 조금씩 달라. 모두 다른 글자가 쓰여 있는걸."

"재미있네." 여우는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숲은 온통 편지로 가득하구나!"

오래전에 나는 지인들과 아주 많은 편지들을 주고받곤 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은 아직도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서랍에서 벗의 편지 한장을 꺼내어 읽어 본다. 만년필로 써내려간 편지. 많은 메일을 주고받았지만 이 한 장의 편지를 받을 때의 즐거움에 비할 수는 없다. 편지를 읽으면서 한때 나누었던 대화의 편편들이 스쳐간다. ...안녕하신가.

오늘 나도 닭의장풀꽃잎 잉크나 현호색, 용담꽃, 투구꽃의 꽃잎 잉크를 내 만년필에 가득 채워 누군가에게 편지 한 장을 쓰고 싶다. 아니면 가을햇살이 써내려간, 바람의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11월의 나뭇잎 편지 한 장을 받거나.... 이 가을, 거리에도 낙엽편지들이 발 끝에 채이며 나뒹군다. 그 편지들 속에 끼어있는 당신의 편지를 찾아 읽고 싶다.....

남정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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