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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면 덕동리 그리고 고금도진

[에세이-향토역사기행]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11.06 10:51
  • 수정 2017.11.0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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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엊그제 일요일은 하늘이 아주 맑아서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손톱으로 그으면 쨍하니 금이라도 갈 듯” 하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좋은 날이었다. 길섶에는 억새가 허옇게 풍화되기 시작해서 햇볕에 반짝였다.

그 반짝임은 고금도행 철부선을 타고 오면서 보였던 역광을 받은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과도 묘하게 일치했다. 그래서 ‘아, 가을이다!’는 말을 몸으로 실감한 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물결은 바람이 자면 일렁이지 않고 억새꽃은 이윽고 바람에 날아오르듯 신지도와 고금도간을 이어주는 다리가 완성 되면 철부선도 고생하는 부모를 뒤로하고 입대하던 서글픈 어느 집의 기억과, 고금도로 시집 간 완도 댁이 신행을 갈 때 느꼈던 콩닥거림도 곳곳에 추억으로 남기고 쓸쓸히 묶여 있을 거였다.   

우리를 싣고 간 차가 다리 인접도로 공사로 흙먼지 날리는 길을 따라 유자막걸리를 만드는 배개석의 주조장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수십 년 만에 싸락눈이 뿌려진 듯 마르고 있는 고두밥을 맛보았다. 아울러 입 속에서 밥알과 함께 어릴 적의 기억도 굴러다녔다. 그리고 어울려서 덕동리로 갔다.

고금도진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듣고 성(城)이었다는 곳에 서서 산을 올려다보았다, 길을 따라 산정으로 올라갔지만 중계소의 문은 굳게 잠겨 발길을 돌려 농로를 따라 갔다. 시멘트로 포장이 된, 정유재란 때 사용했을 조란탄과 동글동글한 갯돌들을 바닥에 깔고 시멘트로 덮은 그 길을 따라 갔다.

말을 묶어 두었다는 마장터 곁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성뜰에 서서 바라본 바다에는 왜장의 목을 베었다는 참왜도와 작은개섬과 큰개섬이 있었다. 사백여년 전에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저들의 피와 우리들의 눈물이 섞였던 참혹함을 보았을 그 섬들이 말도 없이 떠있었다.

길을 돌아서 옛 고금도진의 본영이 있었던 자리로 갔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다는 자취는 없고 다만 옛 동헌의 터는 고금도 사람 모두 나서서 석축을 했던 그 자리에 면사무소가 들어섰다가 또 주인이 바뀌어 교회당이 섰다가 이제는 빈터만 남아 있었다. 다만 한편에 자리한 늘그막한 팽나무와 시누대와 물정 모르는 멀구슬나무만 오는 사람을 맞을 뿐이었다. 고금도진이 폐진 되고 몰아닥친 일제 강점기에는 수십 수백 척의 군선이 떠있었을 바다에 왜선이 주인 노릇을 하다가 이제는 양식장과 거기를 오가는 작은 배들만이 가을빛을 받고 있었다. 

이미 진지가 있던 곳은 찾을 수도 없고 다만 역사 속에서나 고금도진에 조명 연합군이 있었고,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물자를 비축했었고, 명의 진린 도독이 충무공을 노야라고 부르며 높여 대접했고, 충무공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의 출병이 바로 이 자리에서 1598년 음력 9월 보름에 했다는 사실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이 기억을 일깨워 고금도진이 ‘여기 있었노라.’ 는 표식이라도 하자고 나서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 성뜰에 잠시 서서 바라본 바다에는 섬들 주위로 바닷물이 점점 밀려가서 큰개섬까지 이어지는 육로가 언뜻 드러나기 시작했고 멀리서는 은빛 물결이 억새처럼 풍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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