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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칠이 아재 "요것들아, 나 죽었는지 알았쟈!"

[이 사람]허리수술 받아 안보이자 '죽었다더라' 소문난 완도 명물 '용칠이 아재'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9.30 17:54
  • 수정 2017.09.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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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협어시장에서 품삯으로 받은 고기를 작은 키 때문에 질질 끌고 장터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는데 그가 계속 보이지 않자 완도5일장에선 급기야 "용칠이가 죽었다더라!"는 이상한 소문이 올초 퍼지기 시작했다.

몇달째 모습 보이지 않자 올초부터 "죽었다" 소문 완도 바닥에 파다
올초부터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날마다 새벽 수협어시장에 나와 고기를 날라주고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자신의 품삯으로 쓸만한 생선들을 발로 저만치 툭 차놓는 그를 보지 못한 날이 많아지자 궁금증만 더해 갔다. 5일장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몇사람 모이면 한사람 죽이기는 일도 아니다. “죽었다더라!” “그란 것 같네야, 시방 어판장에 안나온지가 몇 개월인디...” “짠해서 으째야 쓰까 잉~” 이런 소문들이 퍼지자 순식간에 그는 완도 바닥에서 죽은 사람이 됐다. 소문을 확인할 방법은 없고, 소문은 사실로 굳어져 갔다.
이 정도면 누군지 되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다. 바로 ‘완도에서 모르면 간첩’ ‘완도의 명물’ ‘완도 킹카’라고 다양한 애칭으로 불리는 ‘용칠이 아재’ 이야기다.(*용칠이 아재의 본명은 ‘신용칠’로 1948년생이니까 올해로 춘추 69세다. 여기서는 ‘용칠이 아재’로 통칭한다.)  
그로 말하자면 완도읍, 아니 완도의 유명인사가 아니었던가. 왕년에는 현직 군수, 최경주·차유람 선수를 재끼고 본지 여론조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어떤 이는 군수의 불통을 지적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어머니를 위한 효심(孝心)과 성실함을 칭찬했다.

왕년엔 현직군수.국회의원 재치고 완도 최고 인기인물로 선정돼
당시 2007년 여론조사를 하면서 등록한 프로필 내용은 여간 재밌다.
잠깐 소개해 보면 <직업>은 수산물 도소매업(수협위판장 활어를 손수 공급받아 직접 도·소매), <경력>은 잠자리 포획업(5년), 개구리 뒷다리 유통업(8년), 생화수집업(상가집~현재) 등, <특징>은 6~70년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지 완도거리에서 완도 3대 명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함, 당시 명성을 날렸던 두분은 현재 인기급락으로 활동을 접었지만 평소 흰꼬무신만 고집해 남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 항상 허벌레한 인상, 장(날)패션 반바지에 손수 고기를 들고 길거리를 누비는 등 평소 근면 성실함이 많은 군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특히 인기가 5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새벽 4시에 일어나 생업의 현장인 수협위판장을 둘러보며 목표물을 탐색하는 등 근면 성실하고 둘째 훔친 고기는 절대로 비싸게 팔지 않는다는 상도정신과 셋째 오직 지역민들에게만 염가로 판매하고 절대로 타지역 소비자나 업자들과는 교류하지 않는 등 애향정신을 종시기보다 훨 투철하시다는 겁니다, <장점>은 수년간 익힌 상술과 경험이 풍부해 파탄난 지역경제 회생에 가장 적임자, <단점>은 IQ가 50이 약간 못된 것이 아킬레스 건이라고 본인이 인정함, <현재>는 용칠이도 결혼을 한 적이 있으나 부인이 밥을 많이 묵는다고 쫓아버려 현재는 독신을 살고 있으며 개구리 뒷다리 유통업은 개구리 개체 수가 현저히 감소해 접고 있으며 완도수산물 유통에만 헌신하고 있다고.
‘용칠이 아재’가 만들어낸 말도 있다. “에비야, 저기 용칠이 온다. 용칠아 우는 아이 잡아가라”라고 하는 소리다.
호환마마, 호랑이보다도 완도에서 아이들에게 더 무서운 사람이 바로 ‘용칠이 아재’인 것이다.
이렇듯 ‘용칠이 아재’는 완도 사람들의 이웃으로 함께 해왔다. 그래서 “죽었다”는 소문을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 완도군의회 앞에서 ‘용칠이 아재’ 이야기를 듣게 됐다. 허리를 수술해 서울의 동생 집에서 회복 중이라는 것이었다. ‘용칠이 아재’ 어머니를 관리하는 요양보호사의 전언이었다. 그 뒤로도 ‘용칠이 아재’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다 6월 이후부터 직접 확인할 수 없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서 완도로 내려왔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마침 추석 명절도 다가오고 군민들에게는 그의 소식이 선물이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 먹었을 때 하라고, 요양보호기관으로 전화를 돌렸다.
몇몇 곳을 통화하고 나니 ‘용칠이 아재’ 집으로 나가는 곳을 알게 됐고, 그곳 담당하시는 분께서 자세한 얘기를 들었을 수 있었다.

 ‘용칠이 아재’ 허리수술로 집 돌아와 재활치료 중
이 요양원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그가 허리 수술을 했단다. 우연히 들었던 요양보호사의 전언처럼 서울의 동생 집에 회복차 상당히 오래 기거를 했고, 5월말 경 그의 어머니를 관리차 집에 갔을 때 내려와 있었다는 것. 그런데 허리수술 과정에서 신경을 잘못 건드려 하반신을 잘 못쓰고 있고, 거동이 불편한 94세의 어머니가 수발 아닌 수발을 들고 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나왔다. 구르마 같은 걸로 걷기 재활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엔 ‘용칠이 아재’가 종종 보조장치 없이 마을회관까지 내려와 얼굴을 본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용칠이 아재’가 얼른 나아 “요것들아, 나 죽었는지 알았지야!”하고 수협어판장에 나타나 날마다 하듯이 일을 도와주면서 생선을 툭툭 한쪽으로 차는 모습 말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제까지 친구로서 삶의 애환을 같이 해왔듯, 이제는 우리가 그의 애환을 같이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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