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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민족, 나를 외면한 나라

[완도 근현대 인물열전]고난의 근현대사에 맞선 민족운동가, 이기홍 선생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9.04 10:31
  • 수정 2017.09.0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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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가 이기홍 선생.

 한국 근현대사에서 물러섬 없이 불의에 항의하고, 강인한 사상과 신념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민족운동가 이기홍 선생은 1912년 8월31일 완도군 군외면 영풍리에서 아버지 경주 이씨 사열, 어머니 원주 이씨 대금 사이의 4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일합방으로 2년이 지난, 조선총독부에 의한 식민통치가 시행되면서 한반도에는 일본군의 군홧발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일장기가 방방곡곡에 나부끼는 비운의 망국사가 시작된 시기였다.

일제의 방해가 없는 곳으로 찾아 선생의 가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금면 청룡리로 이사했다. 선생은 8세때 동리의 한문서당에서 천자문을 처음 배웠다. 문맹을 떼는 첫교육을 받은 셈이다. 11살 되던 때인 1922년 고향 고금에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선생의 삶은 이곳에서 집안의 오촌지간 당숙 이현열 씨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1912년 완도 군외 영풍 태생, 어릴 적 고금만세운동 목격
어렸을 때 이현열 씨 등이 주도한 고금 3·1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7년 후인 1926년 보통학교 5학년이던 선생은 또 하나의 만세운동을 체험하게 되니 6·10 만세운동이다. 1919년의 3·1운동이 진압된 후 일제의 감시는 더욱 삼엄해졌고 일제의 강점 기간이 길어지면서 국내외의 독립운동도 무기력한 침체의 늪을 겪던 시기였다.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그 장례식에 맞추어 전국 각지에서 은밀하게 3·1운동을 다시 재현하기 위한 각계의 움직임이 바로 6·10만세 운동이었다.

1929년 광주고보 입학, 독서회 조직에 가담
6·10 만세운동이 벌어진 2년 후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4월 광주고보(오늘날 광주일고)에 입학했다. 선생이 2학년이 되던 해인 1929년 6월 광주 시내에 각 학교별, 학년별로 독서회가 조직적으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광주고보와 광주사범학교, 광주농업학교에 독서회가 조직되었고 각 학교별 대표 중심으로 독서회 중앙지도부가 결성되었다.

독서회 중앙지도부가 결성되기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조직은 성진회였다. 이 모임이 후일 독서회의 모체가 되었다. 1929년 광주고보 2년 재학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했고, 이듬해에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퇴학당했다.

광주고보 2학년 재학 중 백지동맹 주도 퇴학
선생이 고보 2학년의 어린 나이에 퇴학을 당하고 낙향했을 때 고향에는 당숙인 이현열 선생이 일제로부터 강제 귀국당하여 돌아와 있었던 때였다. 고향에 온 이현열 선생은 민족독립운동의 기본세력인 농민 중심의 운동에 착수하여 차원 높은 이론과 해박한 학식, 풍부한 대중조직 투쟁의 경험을 현실에 적용하고 효과적인 운동에 필요한 창조적인 지도 방침을 세워 진행했다.

선생도 고향에서 농민운동에 투신했으며 일본인 지주와 경찰과 맞서 투쟁하여 일부 승리를 거둔 항일투쟁의 본보기였던 고금도 용지포 간석지 투쟁에 참가했다. 1934년에 선생은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고향 내려와 고금 용지포 간척지 투쟁,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복역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한반도 최남단 섬지역 완도를 포함한 5개군(완도, 해남, 장흥, 강진, 영암)에서 관련자만도 3,000여명에 이르고 558명이 연행되거나 구금되고 57명이 기수돼 재판에서 공산주의 운동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934년 2월 27일부터 몰아닥친 그야말로 일제의 광풍의 탄압사건이었다. 완도지역만 해도 전남운동협의회의 회비는 남자 20전, 여자 5전을 받았는데 자발적으로 회비를 납부하는 사람이 약 5,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완도에서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그야말로 문제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을 선생은 김홍배, 오문현, 황동윤 등과 함께 주도했다가 체포돼 복역하게 된 것이다.

억울한 구금생활을 끝내고 풀려나 집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1939년 1월 7일부터 선생은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사상범 보호관찰소로부터 속히 광주로 오라는 서신을 받은 것이다. 선생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엄혹한 시기에는 무조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명령이었다.

공산주의 운동으로 매도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주도하다 체포·복역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시위원을 지냈으며 1949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동생, 매제가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6.25 발발 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체포돼 처형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인민군 진주 후에는 인민 정권에 의해 반당분자로 몰려 체포돼 2개월여 구금됐다. 종전 후 1954년에는 구국동맹 사건으로 3년여의 옥고를 치렀고, 1960년에는 광주 4·19 시위로 체포 구금됐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독재정권 하에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매 정권마다 15회 이상 검거, 12년 6개월 투옥생활을 거쳤고, 자녀들은 지긋지긋한 연좌제에 시달렸다. 생애 말년 실명 상태에서 구술로 자신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996년 12월 7일 사망,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선생은 1929년의 광주 학생독립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1930년대 일제의 사상탄압이 극치에 이를 때는 대중 속에서 조직운동, 교육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일에 앞장섰다. 해방이 된 후에는 분단되어 가는 조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온갖 탄압과 질시 속에서도 꿋꿋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한 뒤로 이기홍 선생은 끊임 없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의 길을 걸었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감옥에 끌려가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가족이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선생은 타협하지 않았다.
 


‘운동가’지만 ‘기록가’, 미지막 호흡까지 이 세상에 받쳐
'내가 사랑한 민족 나를 외면한 나라'는 이기홍 선생의 굴곡진 삶과 방대한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유고집의 첫권이다. 이어진 두권째의 제목은 '역사의 교훈 우리 민족의 미래'다.

선생은 생애 말년에 실명이 돼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구술로 자신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번에 발간된 유고집은 선생의 구술자료를 엮은 책이다. 그의 삶은 선생 개인이나 가족의 수난사에 그치지 않고 우리 현대사의 모순과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민족수난사의 축소판이다.

 '이 글을 통해 일생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고스란히 바치고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뒷전에 무명 애국자로 매몰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능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록에 남기고자 했다. 그들의 기록을 우리 민족의 발전에 참고로 하는 것은 필자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 생각했고, 필자뿐만 아니라 그 동지들의 유가족과 애국 국민들의 공통된 소망이라 믿고 있다.'
이기홍 선생이 구술로라도 자신이 겪은 삶을 남긴 이유다.

이기홍 선생 유고집, 역사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애국지사들을 위한 기록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이름들은 그동안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민족사에서 지우려했던 친일세력 중심의 왜곡된 민족사에 대한 항변이자 무명의 애국자들에 대한 선생의 헌사이자 추억이다. 합방 망국 이후 친일 반역세력의 득세와 해방 후는 물론 군사정권으로까지 이어지는 친일세력에 의한 부와 권력의 독점 구조는 반드시 해소, 극복해야 할 민족적 숙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 선생이 가장 가슴 아파하던 우리 역사의 현주소였다. 책은 그러한 분노와 회한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유고집이 나오면서 한국 현대사는 물론 광주ㆍ전남지역의 현대사 중 상당 부분은 새로 쓰여야 할 대목이 많다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귀중하고 반가운 자료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올바른 미래를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 일반인들에게도 가치 있는 가르침이 되는 소중한 자료다.

안종철 간행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이 유고집에 담긴 기록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성실한 삶을 살며 실천가와 이론가의 모습을 겸비했던 탁월한 인물이 몸소 한국 현대사를 체험하며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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