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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완도민주항쟁은 그렇게 타오르고

[6월 민주항쟁 특집]87년 6월항쟁과 완도 2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6.17 13:32
  • 수정 2017.06.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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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너무나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참 잘생겼다는 걸. 그러나 내 눈엔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겐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나는 왜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지금이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율을 맞추면 나에게는 그것이 겉멋을 부리는 것처럼 생각되기까지 한다.>>
<<나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꽃으로 만발한 사과나무에 대한 도취와 저 독재자의 연설에 대한 분노다. 그러나, 후자만이 나로 하여금 당장에 펜을 잡게 한다고.>>

시인으로서, 그 시적 눈이 보고자했던 건 누군가의 아픔이었다. 아름다운 꽃보단 꽃이 피어나는 이면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자했던 베르톨트의 신념.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다.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그 위에서 집 지을 수 없다. 사랑이란 어떤 완성된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니까. 사랑은 어느 순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가 그 사람이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자 이내 실망해 버리는 어떤 상(象)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내 안에서 형성하고, 나와 하나에서 합일해 발전시켜 나가며, 떼어 냈을 때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이상의 것, 그 사람과는 다른 창조적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류 최고의 생산적 태도다.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 가고자하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 가슴에서 뜨겁게 뜨겁게 진화하며 또 다른 변혁을 낳게 되는 1987년 6월 10일. 금남로. 완도민주화운동의 1세대였던 황권태 선생이 병석에 입원해 있을 때 서정창 전 도의원은 아들인 황욱(완도중학교 총동문회장)씨와 함께 찾았다. 황 선생은 서정창 전 도의원의 두 손을 꼭 잡으면서 "이제, 의식 있고 의협심이 강한 그대들이 지역사회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달라!"했다.

서 전 의원은 대선배의 말에 그 자리에서 번개에 맞은 듯 했다고. 그때부터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됐고, 암울했던 1980년대를 겪었다.  1987년 6월 10일. 경찰은 이날 대회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원천봉쇄를 위한 총력작전에 들어갔다. 오전 6시부터 전남도청 앞 주차장을 폐쇄한 데 이어 충장로 입구, 한일은행 사거리, 노동청 사무소 등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 시민들의 통행을 차단됐다. 이날 시위대는 수 백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오후 늦게 황금동 4거리에 있는 충장로교회 옥상에 ‘군사독재 타도하자’는 플래카드가 내 걸리고 확성기를 통해 도청으로 가자는 국본 전남본부 공동의장 김병균 목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1,500여 시민들이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시위에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광주전남에서 239명이 연행됐다. 이날 완도에서는 김정호 전 완도기독교청년연합회(이하 기청) 회장이 대오에서 이탈해 백골단에게 잡혀 연행된다. 서정창 전 도의원은 "그때, 우리는 극렬한 시위 방법을 몰랐다. 젊은 나이였던 김정호 회장은 시위대 앞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돌을 던지다 내가 최루탄에 맞아 눈을 못 뜨고 있는 것을 보고 인근 식당으로 데려가 물로 씻겨 주었다"했다. 

김정호 본지 대표(당시 기청회장)는 "서정창 선배가 최루탄을 맞고 고통을 호소하자 인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수돗물에 눈을 씻겨주다 대오에서 이탈하게 됐고, 백골단에 쫓기다 어느 상가로 숨어들었지만, 백골단 2명에게 발견돼 곤봉 세례를 받으며 연행됐다"고 회고했다. 김 대표는 “경찰차(닭장차)실려 광산경찰서로 연행됐는데 50여명이 함께 연행됐다. 이 때 시위대 앞에서 극렬하게 저항했던 대학생과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전했다. 경찰 조사는 저녁 늦게까지 진행됐다. 이날 경찰은 "왜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완도에서는 누가 참여했는지를 물었다. 나는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반윤리적 독재에 맞서 신앙인의 양심과 고백적 측면에서 시위에 참여하게 됐으며, 단독 상경했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한편 완도 국민운동본부에서는 기청회장의 연행 소식에 모두가 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구명 운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차관훈 전 군수는 친분 있던 광주 모 방송국의 보도본부장에게 김 회장의 구명을 요청하게 되고, 보도본부장은 적극 도왔다.

또 저녁 8시께는 7~8명의 목사들이 경찰서 정문 앞에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경찰을 압박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전남 목회자들은 교단소속 청년인 김 전 회장의 석방을 더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이들의 노력으로 김정호 전 기청 회장은 풀려나게 됐고 시위 장소였던 금남로로 다시 돌아온다. 완도 국본 회원들이 인근에 숙소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호 대표는 “그때가 자정 무렵이었는데 완도에서 올라왔던 이들은 모두 내려가고, 최형석 전 도의원과 당시 완도에서 민주쌀집을 운영했던 김운기 씨가 고생했다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했다. 

그 어둠 속에서 뜨겁게 안아주며 반기던 최형석 전 도의원과 김운기 씨, 곤봉세례에 멍이 들어 아픈 몸을 가누면서 앞으로 진행될 지역문제들을 늦은 밤까지 논의하다 다음날 완도로 향한다. 6월 완도민주항쟁의 서막은 그렇게 떠오르고 있었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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