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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성은 어디에 있을까

[완도 시론]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5.12 16:28
  • 수정 2017.05.1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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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완도의 옛 이름은 청해(淸海)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완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145년에 간행된 삼국사기 44 열전(列傳) 4, 장보고전에 청해진의 위치를 지금의 완도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12세기 이전부터 완도라는 지명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이름 하나를 더 가지게 되었으니 ‘가리포(加里浦)’가 그것이다. 사실 가리포라는 이름의 연원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역사서를 뒤지고 또 뒤져봐도 어떤 뜻인지 찾지 못했다. 다만 단초 하나가 있으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섬은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던 차에 수군의 진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이는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왕의 영토인 리(里)가 더해진(加) 포구라는 의미라고 보는 게 그것이다.

완도는 청해진이 혁파된 후 고려시대 474년과 조선시대 초기 130여년을 합해서 600여년을 중앙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땅이었고, 완도 사람들은 중앙 정부의 공도정책((空島政策) 때문에 숨어서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1521년 조선 중중 16년에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완도읍의 지금의 군청이 있는 곳에 진(鎭)을 설치하고 이듬해 1522년 초대 수군첨절제사 이반(李班)이 부임하였으며 해남의 남창에 위치해 있던 달량진을 병합하여 관장하였다. 이로서 완도는 청해진 시대 이후로 공식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된 셈이었다.

가리포진성의 위치는 지금의 청해어린이집이 자리한 터에서 시작하여 남망산 기슭을 돌아 완도중학교 아래를 가로질러 충혼탑까지 이어졌으며 그 길이는 3리(1,2km) 높이는 십일척(3,3m)의 돌로 쌓은 성이었고, 네 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적을 치기 위해서 몸을 숨길 낮은 담장 -치첩(雉堞)- 이 950개소, 성문 밖으로 앞을 둥글게 가려서 쌓은 곡성(曲城)이 6개소였다.

그렇다면 가리포진은 왜 이 곳에 있어야만 했을까? 이 물음에는 “일본과 인접하여 한번 돛을 올리면 닿을 수 있는 곳이어서 설치했다”는 게 가장 적합한 답일 것이다. 즉 여기에서 돛을 올리면 한 번에 닿을 수 있다는 말은 거꾸로 일본에서도 왜구들이 한 번에 침입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왜구들과 많은 싸움이 있었으며 정유재란 중 충무공이 남망산에 올라서 “測左右 賊路諸島 歷歷可數 眞一道要衝之地 - 좌우를 살피니 적이 지나는 길과 여러 섬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으니 참으로 한 도의 요충지라”는 말을 남겼으리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명량해전은 이 해역의 물길을 가장 잘 아는 가리포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 왜구들의 출몰을 맞아 30여척의 적선을 불태운 가리포대첩으로 임진왜란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한 일도 있었다.

이렇듯 가리포진이 차지한 위치가 특별했기 때문에 많은 전투가 있었고 수 많은 영혼들이 칼날 아래서 외로운 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들의 고향은 이 곳 가리포진일 것이다. 또 한 가리포진성이 무너지고 다시 개축하기를 여러 번 했고 여러 누각은 불타서 무너지고 다시 세우기를 되풀이 했을 것이니 거기에 얽힌 사연들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들은 가리포진성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전투 중에 순직한 첨사만도 13명이니 함께 목숨을 다한 장병들이야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수많은 영혼을 추모하는 의미에서라도 다시 세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단절된 역사가 이어질 것이고 이어진 역사 속에서 나올 이야기가 우리 군에서 부르짖는 관광 완도의 속내를 채울 것이니 그러하다. 아울러 서남해안 전역에 충무공을 기리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뉴스도 있다.

그런데 충무공은 가리포진을 관장하는 54대 첨사였음이 분명하고 명량대첩 후에 전선과 병사의 부족을 느껴서 고금도진에서 수군을 양성하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승리는 없었을 것이니 정유재란의 한 축은 고금도진 이었다. 그런데 고금도진을 후방에서 지원한 곳은 충무공이 추천하여 첨사가 된 이영남장군이 이끄는 가리포진이다. 그래서 충무공을 기리는 사업 중의 하나는 가리포진성을 복원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내용과 형식이 일치된 역사적인 의미를 새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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