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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빼앗긴 들에 어디 쉴만한 곳이 있으랴

[완도 근현대사 인물열전 4]국내외 맹활약한 민족해방운동가, 정남국 선생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4.29 16:19
  • 수정 2017.04.2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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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있어 지역 단위에서 반일투쟁이 활발했던 곳으로 우선 거론되는 곳은 소안도이다. 소안은 일찍이 외부와의 접촉과 사회 내적인 요구에 따라 반일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소안의 반일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그리고 1920년대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도 계속됐다. 특히 1930년 전라남도 다도해지역의 혁명적 농민운동은 소안도의 반일투쟁이 한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곳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타났다. 송내호·송기호 형제와 정남국 그리고 정창남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 정남국 선생은 국내외로 오가며 민족해방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소안에 있을 때는 선진적인 청년으로 사상단체에 가담하면서 지역의 활동가로 운동을 견인했고 서울청년회계의 사람들과 접촉하여 이론을 다져갔다.

소안에선 사상단체 가담, 지역 활동가로 운동 견인
이에 따라 그는 지역의 운동가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규모의 반일투쟁 조직에 적극 가담해 갔던 것이다. 이후 일본에 건너간 정남국은 노동운동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 국내와 지속적인 조직적 유대를 갖고 정치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 양대 조직인 조선공산당과 춘경원당의 당 조직에 참가했던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그는 국내운동의 경험과 소안지역 출신들의 지원 아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책임을 맡아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국내와의 조직적인 연대는 소안학교 폐교사건을 일본에 선전하여 국제적인 투쟁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그도 1930년대에는 합법적인 투쟁공간의 마련을 위해 진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청년회계와 접촉해 이론 다지고, 전국 규모 반일투쟁 조직 적극 가담
정남국 선생은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기본운동에 충실했다. 오랜 시간의 투옥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 전기간 동안 그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통해 국내의 운동과 일본의 조선인운동을 연결하는 한 지역으로 소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은 가교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남국 선생은 1897년 7월 소안면 비자리에서 태어나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당시 가세가 궁핍하여 상인들의 짐을 짊어다 주기도 하고 해산물 장사를 했다고 한다. 1912년 완도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4년 광주농업학교에 진학했으나 빈한한 가정형편으로 중퇴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3월 15일 완도 읍내에서 예수교, 천도교도를 규합하여 송내호,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정태 등과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담당했는데, 영광·나주·함평·무안 등지가 이때 그가 활약한 지역이었다. 신지의 임재갑 선생과 군외의 김영현 선생이 작성한 연보에 따르면 그는 1919년 고려혁명 동지회 총무를 지내는데 그 단체의 실상은 알 수 없다. 같은 소안 출신으로 신간회 간사 등 전국의 항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송내호 선생과 손아래 동서 간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배달청년회나 대성회 등을 통한 소안에서의 활동은 연보에 의하면 1923년 그는 전라노농연맹 상임위원, 남조선노농총동맹 위원, 전국농민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즈음 수의위친계의 명에 따라 임재갑 등을 이끌고 간도 용정에 파견되어 간도지방의 운동을 지원하고 약 1년만에 귀환, 1924년 소안노동연합대성회에 참여했다가 10월 노농회 사건으로 1년간 복역했다. 다음해 출옥한 정남국 선생은 1926년 6월 사상단체 살자회에 참여했다.

1926년 수의위친계 명 따라 도일, 오사카와 도쿄서 노동운동 투신
1926년 말경 수의위친계의 명에 따라 도일, 오사카와 도쿄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이 일본으로 간 것은 노동단체의 파견형식이었다. 도일과 함께 선생은 재일조선인운동과 국내운동 사이의 매개고리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의 활동경험을 곧바로 일본지역에서 노동운동의 조직활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이었다. 이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에서는 1920년대 중반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1926년 4월 제3차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했다. 5월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됐다. 여기서 하나의 궁금증이 나온다. 정남국 선생이 방대한 조직으로서 결성된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이 될 수 있었을까? 두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공산당의 정책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다.

소안사립학교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부는 “조선공산당 일본부가 이 사건을 맡아 팜플렛을 작성, 배포함으로써 선전을 강화해 나간다”는 전략을 세우는데 이 전략이 일본에서 정남국 선생이 정력적 활동을 벌이는 뒷받침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다른 하나는, 선생이 그러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주로 오사카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완도노동자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1920년대 당시 소안도는 일본으로 가기에 편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복목환, 군대환이라는 배가 부산-여수-완도-소안도-노화도-목포-오사카를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의 관헌자료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오사카 지역에 전라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이자료는 “1923년 2월부터 제주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조선인 전용의 기선항로가 개설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1923년 9월말 현재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2만 1,984명의 조선인 중 전라남도 사람은 51.6%에 달하는 1만 1,352명이었다. 고인이 된 전 완도항일운동기념사업회 김진택 회장에 의하면 그가 속한 소안초등학교 8회 졸업생(1937년 졸업) 44명 가운데 40명이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단순노동자로 전락했으므로 이들이 정남국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같은 해 5월엔 오사카와 도쿄, 요코하마의 완도 향우회원 1천여명을 모아 소안학교 폐교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지만 강연 도중 일제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기도 했다. 또한 6월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으로 오사카 항구에서 4단체 회원 80여명이 참석한 합동대회와 소안학교 복교동맹 실행위원으로 선임돼 대판에서 총독부실정 반대 실행위원회 주도했다. 8월엔 일본 문부대신을 방문해 소안학교 폐교조치에 대해 항의했고, 9월 귀국해 소안학교 복교를 위해 총독부 학무국장 등을 만났다.

신의주공산당 사건으로 검거, 1년 8개월 징역살이
이듬해 4월엔 서울청년회 구파의 춘경원공산당사건(일명 신의주공산당 사건 혹은 김경태 사건)으로 검거됐다. 공판은 1929년 7월17일 시작되어 1930년 3월15일 2심판결이 있었다. 정남국 선생의 형량은 1년 8개월이었다. 이때 정남국 선생과 함께 신의주 경찰에 검거되어 공판을 받은 소안인들로 정창남, 위경영이 있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1926년 9월부터 1928년 초까지 존재했다. 가입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소안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존재했다. 당원은 신준희, 최형천, 강사원, 정남국, 신광희, 위경영, 최평산이었다. 이들은 바로 소안에서의 갖가지 민족운동의 전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1930년 8월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선생은 다시 도일했다. 1933년 일본에서 조선인실업자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같은해 삼신철도 노동자 해고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1934년 에는 친일단체 상애회 테러사건으로 나고야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는 등 출옥 후에도 일본에서 사회운동에 참가했다.

해방 후 2대 완도 국회의원 당선, 최초 노동쟁의법 발의
1945년 선생은 해방을 일본에서 맞이하고 10월 귀국했다. 1950년 5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완도에서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국전쟁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는 못했으나 한국 최초로 노동쟁의법을 국회에서 발의, 통과되지는 못했다. 1955년 6월 19일 여수 제중병에서 향년 59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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