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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아가씨의 로망은 육지! 그런데 기대했던...

[나의 반쪽]김영란 독자(김동삼 군의원 부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4.29 08:39
  • 수정 2017.04.2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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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년 지나면 노인이 되는 60대 초반, 배움도 부족하고 어디 나서기도 싫어하며 자기 표현도 서툰 그래서 항상 뒷전을 찾는 소박한 여자입니다. 그랬기에 완도신문 편집국의 원고청탁을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간곡하고 간곡한... 결국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본다는 마음으로 생각 나는데로 적어 보겠습니다.

저는 노화읍(그때는 노화면)의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지는 40년이 되었습니다. 1976년 노화면사무소로 첫 발령을 받은 남편. 노화면에 사는 남편의 고향 선배 소개로 저와 맞선을 보게 되었고 서로 인연이 되었던지 그 이후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노화는 교통도 불편하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섬이었죠.
섬 아가씨들의 로망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남편은 면사무소 직원인데다 군대도 갔다 왔고 더구나 고향이 골(완도읍)이라 이제는 육지에 나가 살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수줍은 측면도 있었느나 한편으론 너무나 가슴이 벅차오르며 기뻤습니다.

1977년 2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예식장도 변변치 않은 터라 남편 직원들이 노화면사무소 회의실에 예식장을 꾸미고 주례는 면장님이 서 주셨죠. 노화면 소재지 작은 셋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다 남편은 면사무소에 근무한지 1년 만에 완도읍사무소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렇게 기대했던 육지의 생활이었지만, 정작 이때부터 고생이 시작 되었습니다. 남편은 종손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으로서 집안도 가난했고 완도읍이라 해도 시내가 아니고 시골(장좌리)이었습니다. 노화면에서 나와 시댁인 시골 초가집에서 3개월 정도 살다가 시부모님의 권유로 읍내로 나왔습니다. 그때 남편은 공무원 생활이 1년 밖에 안된 처지라 모아둔 돈도 없었고 집안의 도움을 받을 형편도 못되어 그 당시 40만원(지금의 400만원 정도) 전세방에서 그것도 빚을 내 읍내에서 신혼생활을 하게 되었죠.

결혼한 이듬해부터 아들, 딸을 1년 사이로 낳았습니다. 출산할 때마다 병원이 아닌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시골 시댁에서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였습니다.
또 시댁에선 농사를 지어 바쁜 농사철이면 장남 며느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논밭가에 앉혀 놓고 농사일이 끝난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여러가지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언제나 공의를 지향하며 원칙과 소신 속에서 살아가는 남편에 대한 자부심은 저에게 힘을 주었죠. 그러다 아이들이 자라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을 때 가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미역공장을 다니게 되었죠.

그 사이 아이들도 성장하면서 7번이나 전세 사글세를 전전하다 20년 융자금 상환 국민주택인 조그만 규모의 아파트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지금의 아파트로 오기까지 18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나이가 50이 돼 있더군요. 그때, 인생을 돌이켜 보니 초등학교만 나온 저로서는 항상 가방끈이 짧은 게 남편 수준에 못 미쳐 한이 되었고 열등감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진학을 결심했죠. 나이가 들어서도 다닐 수 있는 목포 정보중ㆍ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친구와 함께 4년간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목포까지 다녀서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떻게 그런 열정이 나왔을까 스스로에게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남편은 관운은 있었던지 순조롭게 승진을 하고 인정받은 자리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정년 2년을 앞두고 어느 날 갑자기 명예퇴직을 한 후, 군의원에 출마하겠다고 하여 만류도 해보았지만 결국 2010년 남편 뜻대로 지방선거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조용하게 살아왔던 저로서는 뜻하지 않게 어려운 선거판에서 마음 졸이며 있던 없던 용기를 모두 내 가면서 두 번이나 치렀습니다. 남편의 의원 생활이 시작되자 저의 공장 생활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2년 전부터는 의원에겐 공무원 연금도 중단해 버려 생활비는 저의 몫이 되었네요. 이제 아들, 딸 모두 결혼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손주도 셋이나 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도 평범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길이 있고 생각하는 바램도 다르겠지만 이제 저의 소박한 바램은 온 가족과 90이 된 시어머니, 혼자 사는 아이들의 작은아빠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남편도 의원직 잘 마무리 하였으면 합니다. 저의 공장 생활은 남편의 의원직 마감과 동시에 끝이 날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본 코너는 현대사회에 더욱 상실해가는 가족애를 회복하고 감동의 부부애를 위해 기획되었다. 박영란 김동삼 부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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